진주 속 진주

<궁으로 간 최순이>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3. 12. 14. 10:33
728x90

궁으로 간 최순이를 따라 진주성에 가다

 

 

역사 현장을 둘러보는 탐방은 언제나 설레게 합니다. 더구나 저자와 함께하는 역사 기행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궁으로 간 최순이>를 쓴 양지선 경상국립대 교수와 진주성에서 역사 탐방이 조선 마지막 궁중 무희 최순이, 진주성으로 돌아오다라는 주제로> 113일 오후에 있었습니다.

 

 

진주성 정문인 공북문을 들어서 안쪽에 모여 최근 복원한 중영으로 향했습니다. 마루에 앉자, 양 교수는 책을 낸 게 운명이었다며 책 쓴 동기부터 먼저 들려주었습니다. 진주 검무 이수자요, 연구자인 양 교수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최순이(1892~1969, 예명 최완자)를 통해 우리는 진주의 자랑이기도 한 진주 검무와 진주 교방 문화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어서 관기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양 교수는 관기를 전문인, 예술인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독 기생은 아직도 단순히 성()을 파는 이미지로만 인식한다. 우리는 조선시대 '관기'의 직업적 숭고함과 그들의 자주성을 부각해 섹슈얼한 이미지로서의 기생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자 한다. 그들의 자주적이고 헌신적이기까지 했던 관기로 사는 삶과 생활에 주목한다. 남성을 위해 살았던 '도구'로서의 기생이 아닌, 높은 수준의 가무를 익혔던 '전문인', '예술인'으로서의 그녀들의 인생 말이다.”

 

 

1892년 고종 31년 진주 봉곡동에서 태어난 최순이는 1900년 진주교방에 입학했고 1902선상기뽑혀 궁으로 가 연향에 참가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가 망한 1910년 관기 출신의 다른 기생들은 요리점에 취직하여 계속 춤과 노래를 선보이며 경제활동을 할 무렵 최순이는 고향 진주로 돌아왔습니다. 궁중의 춤을 전수하기 위해 진주 기생조합에서부터 진주 권번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진주 검무의 스승으로 활동했습니다.

 

 

중영에서 벗어나 진주성 우물가 근처에서 최순이와 진주 검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뜨락은 매월 5월이면 논개제가 열리고 <의암별제>가 펼쳐지기도 합니다.

 

 

진주 검무의 유래는 신라의 황창랑이 추었다는 황창무에서 비롯한다고 합니다. 최순이가 궁에서 배운 검무를 진주에서 후예들에게 가르친 덕분에 1967년 진주 검무는 전국의 춤 중에서 유일하게 지역 이름을 앞에 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습니다.

 

양 교수는 문화재 지정에 앞서 진행된 조사 보고서에도 최순이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하지만, 정작 문화재 보유자로는 최순이가 아닌 그의 제자 8명만 이름을 올라가 있다고 합니다. 1969년 최순이가 숨진 만큼 연로했다는 것 등이 이유겠지만 대우받지 못해 아쉽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진주성 관리사무소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옛 모의당입니다. 진주 기생들의 모여 의암별제 등을 논의한 곳이었습니다.

 

 

동아일보 1933825일자에 당시 광경을 物換星移三百餘年(물환성이삼백여년) 죽지않은 忠魂義魄(충혼의백)’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物換星二三百餘年(물환성이삼백여년)

죽지않은 忠魂義魄(충혼의백)

陰六月廿八日晋州(음륙월입팔일진주)擧行(거항)

三壯士(삼장사)論介祭典(론개제전)

 

<진주> 음력 육월이십팔일은 거금 삼백사십이년 전 임진란(임진왜란)에 진주성이 함락됨에 따라 그 당시 수성하든 김천일 최경회 황진의 삼장사가 남강에 투신하야 순절하든 날이오 그 익일인 이십구일은 의기 논개가 역시 남강의 의암우에서 투신하든 날이다.

이같이 살신 보국한 삼장사와 가인을 진주에 기념하기 위하야 진주에서는 춘풍추우 삼백사십이년을 지난 오늘날까지 연중행사로 매년 음력 이십팔,구 양일에는 삼장사와 의기의 제전을 전시민이 거행하여 오든 터인데 금년에도 지난 음력 이십팔일 오후 사시에 의기는 촉석루에서 삼장사는 동일 오후 십일시 유림측의 손으로 창열사에서 다가치 성대한 제전을 거행하엿다.

~’

 

 

모의당을 지나 촉석루로 향했습니다. 촉석루 담장에는 옛 진주 사진전이 우리의 걸음과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촉석루 곁을 지나 의암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습니다.

 

 

의암에서 올라와 의기사로 향했습니다.

 

 

의기사에는 다산 정약용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다산은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舞劍篇贈美人.무검편증미인)’에서 아래와 같이 당시 검무를 추던 기생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

진주성 성안 여인 꽃 같은 그 얼굴에 / 矗城女兒顔如花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 / 裝束戎裝作男子

보라빛 괘자에다 청전모 눌러쓰고 / 紫紗褂子靑氈帽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를 들고서 / 當筵納拜旋擧趾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 纖纖細步應疏節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 / 去如怊悵來如喜

나는 선녀처럼 살짝 내려 앉으니 / 翩然下坐若飛仙

발밑에 번쩍번쩍 가을 연꽃 피어난다 / 脚底閃閃生秋蓮

몸 굽혀 거꾸로 서서 한참 동안 춤추는데 / 側身倒揷蹲蹲久

열 손가락 번득이니 뜬구름과 흡사하네 / 十指翻轉如浮雲

~’

 

 

의기사를 나오는 데 입구에 세워진 의랑 논개 비 앞에서 양 교수는 우리를 불러 세웁니다. 그동안 지나쳤던 의랑 논개 비석을 세운 이들의 이름 속에서 최순이를 만납니다. 물론 최순이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제자들입니다.

 

 

다시금 촉석루에 올랐습니다. 오가는 바람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마저 양 교수의 바람처럼 시원한 춤사위를 곁들인 진주 검무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진주 검무 속 무검(舞劍) 칼의 목이 꺾이지 않는 직선이라 손목에 많은 힘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한삼평사위-배맞추기-숙인사위-뿌릴사위-쌍어리-결삼사위-맨손입춤(깍지떼기)-맨손쌍어리-등맞추기-방석돌이-삼진삼퇴-자락사위-앉은맨손사위-앉은칼사위-위엄사위-연풍대(겨드랑, 옆구리, 양칼, 외칼) 4가지-대형풀기 등의 순으로 이어지는 진주 검무가 눈 앞에 펼쳐지는 기분입니다.

 

진주댐이 완공된 1969년 최순이는 숨을 거둡니다. 최순이는 사망했지만, 그의 제자들이 오늘날 의기 논개의 순절을 기리며 이어오고 있습니다.

 

 

경남일보 1992106일자 의암별제 복원 봉행-4일 진주촉석루서 80년만에 역사적 재현를 보면 ‘80년만에 제자리를 찾은 의암별제가 중양절인 지난 4일 상오 10시 촉석루 누각에서 장대히 거행됐다. 서정훈 진주시장을 비롯 하보룡 진주교육장, 이명길 문화원장, 각계 인사들과 시민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봉행된 별제는 80년전 우리 민족혼을 오늘날 되찾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특히 이날 우중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누각 주변으로 몰려나와 4백년 전 진주성을 끼고 흘렀던 임란의 아픈 역사와 논개의 순절을 상기하면서 시종일관 경건한 자세로 봉행을 지켜봐 의미있기도. 지난 10년간의 복원계획으로 86년 국악인 성계옥씨(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진주의암별제지>를 발간하면서 본격화된 이날 가무제는 그 오랜 산고끝에 맺은 결실이라 독특한 예가 돋보였다. 현재 6월에 열리고 있는 논개제완 구별되는 별제는 제관이 모두 여자로 영신례로부터 예를 갖출 때마다 악가무가 한데 어우러지는 절도 있는 가무제를 펼쳐보였다. 뿐만아니라 제를 마치고 나선 국악마당이 마련되었는데 이날은 민속예술보존회원들의 검무, 지방무형문화재, 선동욱씨의 판소리마당, 김영숙씨의 살풀이와 즉흥가무들이 펼쳐져 논개의 넋을 달래며 시민들을 한데 모으는 신명나는 여흥 무대를 선보였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최순이의 예술혼을 만난 하루입니다.

 

#역사탐방 #궁으로__최순이 #양지선 #경상국립대출판부 #진주성 #촉석루 #진주기생 #교방 #기생 #모의당 #중영 #최순이 #최완자 #예술혼 #진주검무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