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미스터션샤인 애기씨집 원주인, 일두 정여창을 만나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9. 2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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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곳에서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선비를 만나다 - 일두 정여창



 

뜨거운 여름은 가고 서늘한 기운이 완연한 가을. 마음 한편으로 왠지 모를 허전함이 찾아온다. 그저 훌훌 떠나기 좋을 때다. 온종일 마음의 양식을 꾹꾹 눌러 담을 수 있는 함양으로 가면 좋다. 함양은 조선 시대 배운 것을 실천하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실현한 선비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의 고택과 서원 등으로 유명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 일두 정여창 선생은 천령(함양의 옛 이름) 출신의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에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이며 칭송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기리는 함양 남계서원(灆溪書院)

 

진주에서 거창으로 가는 3번 국도가 지나는 함양군 수동면에는 1552(명종 7)에 창건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이 있다. 1566(명종 21)'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 됐는데 '남계'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로 경남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함양 남계서원 안내도

 

붉은 두 기둥 사이를 가로지른 가로대에 나무 창살을 가지런히 꽂은 홍살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서자 풍영루가 나온다. 조선 헌종(1840) 가을에 짓기 시작해 다음 해 620일 낙성한 누각이다. 1847년 화재로 2년 후 중건하고 1937년 전면 개축했다. 풍영루(風詠樓)라 한 까닭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말하라고 하자, 증점은 봄날 봄옷이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다. 공자와 증점을 본받고자 하는 뜻과 함께 풍류 세계가 내 가슴 속에도 있다는 의미다.

 


함양 남계서원 풍영루(風詠樓)

 

남계서원을 들어서며 멈추지 않고 도를 실천하려는 의지를 되새기다

 

풍영루 아래, 세 칸의 누문의 정문인 준도문(遵道門)이다. ‘준도도를 따른다는 의미로 군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도를 실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를 실천하자는 각오를 다지며 준도문 오른쪽으로 들어왔다.

 

서원 주체는 배향한 사당의 성인이 기준이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들어오며 나오는 게 아니라 나간다. 성인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배북향남(背北向南)을 중심으로 삼는다. 남향을 정방향으로 보기에 실제 좌향과 무관하게 모든 집은 일단 남향으로 간주하고 동쪽은 왼쪽, 서쪽은 오른쪽으로 설정한다. 시작점인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인 오른쪽으로 나온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지듯 자연 섭리를 따른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강당인 명성당이 정면에 보이는데 양쪽에 작은 연못이 있다.

 


함양 풍계서원 풍영루

 

부지런히 공부하던 선비들이 서원을 떠나지 않고도 자연과 벗하며 휴식을 즐긴 풍영루에 올랐다.

 

백 척은 안 되지만 높이 솟아 사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교외가 평평하고 넓으며 천택이 감싸 흐르고, 멀리 있는 숲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저물녘의 노을은 성대하다. 백암산의 몇몇 짙푸른 봉우리가 저녁 빗속에 들어 반이 숨었고, 뇌계의 한 방면이 아침 해를 띠고 온전히 드러난다. 대나무, 잣나무 우거진 앞쪽 촌락에선 우는 새가 봄을 재촉하고, 농사짓는 옛 마을에선 늙은 농부가 가을철을 안다.”

 

정환필이 쓴 <풍영루기>처럼 고고한 흥취를 지금 느끼기에는 부족하다.

 


함양 남계서원에 있는 연못

 

풍류가 흐르는 남계서원

 

풍영루에서 내려와 좌우에 있는 연못을 지나 애련헌(愛蓮軒)에 올랐다.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양정은 바른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고 보인은 친구끼리 모여 인을 얻기 위해 함께 공부한다는 뜻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의 건물로 각 1칸은 온돌방이고, 문루인 풍영루 쪽 나머지 1칸은 각각 애련헌(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남계서원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養正齋)와 서재인 보인재(輔仁齋)가 서 있다.

 

애련헌에 올라 연못을 바라보았다. 선비들이 사랑한 연꽃은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가 도학(道學)의 개조라 칭송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1017~ 1073)의 애련설(愛蓮說)과 맞닿는다.

 

유독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여독애련지출어니이불염)

맑은 물결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濯清漣而不妖(탁청련이불요)

속은 비어 있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 치지도 않으며,中通外直(중통외직)하고 不蔓不枝(불만부지)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香遠益清(향원익청)하고 亭亭靜植(정정정식)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可遠觀而不可褻玩焉(가원관이불가설완언)’

 


남계서원 강당 동재에 있는 양정재(養正齋)와 애련헌(愛蓮軒)

 

주돈이를 흠모하는 마음이 연꽃 사랑으로 이어진 셈이다. 서원을 찾은 이들은 애련헌에 올라 연꽃을 감상하며 주돈이의 애련설을 떠올리며 음미했을 것이다.

 

남명선생도 <남명집>에 연꽃을 읊었다.

 

연꽃을 읊다 詠蓮(영련)

 

꽃봉오리 늘씬하고 푸른 잎 연못에 가득한데, 花蓋亭亭滿塘(화개정정취만당)

덕스런 향기를 누가 이처럼 피어나게 했는가? 德馨誰與此生香(덕형수여차생향)

보게나! 아무 말 없이 뻘 속에 있을지라도, 請看默默淤泥在(청간묵묵어니재)

해바라기 해 따라 빛나는 정도만은 아니라네. 不啻葵花向日光(불시규화향일광)’

 

강당인 명성당(明誠堂)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성은 공부하여 현명해지면 성실해진다는 뜻이다. 명성당은 전면 네 칸 규모로 어칸이 없어 남계(藍溪)’서원(書院)’을 따로 두 개의 편액을 걸었다.

 


남계서원의 강당인 명성당은 전면 네 칸 규모로 어칸이 없어 남계(藍溪)’서원(書院)’을 따로 두 개의 편액을 걸었다.

 

만물의 존재 근거인 이치를 뜻하는 성과 사람이 우주 자연의 도를 명철히 밝혀 자기 것으로 만드는 명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명성당 동쪽 좁은 방에는 거경재(居敬齋)가 있다.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을 조심해 덕성을 기르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서쪽에는 바깥으로 행실을 곧게 한다는 맹자의 집의소생(集義所生)’에서 따온 집의재(集義齋)가 있다.

 


남계서원 강당인 명성당에는 좁은 방 거경재와 협의재가 양쪽에 있다.

 

강당 뒤편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언덕에 자리한다. 사당 좌우로 큰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떠나는 벗을 그리워한다'라는 꽃말처럼 선생을 기리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 조심조심 계단을 밟아 사당에 올랐다. 사당에는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남계서원 사당에는 일두 정여창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좌우에 정온(鄭蘊, 15691641)과 강익(姜翼, 15231567)의 위패가 각각 모셔져 있다.

 

선생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 당했다. 중종 때 신원 회복되어 우의정에 추증 되고 광해군 2(1610) 문묘에 배향되었다.

 

사당이 단순히 혼령을 모시는 데 있지 않다. 모신 이를 본보기로 삼아 실천하는 다짐이 담겨 있다. 남명선생도 63(1563명종 18)에 남계서원에 가서 일두 정여창의 사당에 참배했다. 일두 선생이 안음 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공정한 일 처리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앞장섰다. 해결하기 어려운 옥사와 판결이 있으면 반드시 당사자를 만나 물어본 뒤에 시행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남명도 이런 선생의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선비 정신을 본받고자 다짐했으리라.

 


남계서원 사당 좌우로 큰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사당에서 바라본 서원 전경

 

사당을 나와 돌아온 길을 바라보자 주위 풍광들이 와락 안긴다. 근처 일두 선생의 고택을 향했다.

 

<미스터 션사인> 촬영지, 일두 정여창 선생 고택

 

기와지붕을 한 지곡면사무소를 지나 작은 실개천을 건너면 고택들이 잘 보존된 개평마을이 나온다. 노란 호박꽃이 핀 돌담을 따라 마을 속으로 들어가면 일두 선생 고택이 나온다. 고즈넉한 담장 너머로 만나는 전통 한옥이 반긴다. 돌담과 토담이 아름다운 개평마을은 구불구불한 고샅길이 아늑하다.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 돌담길

 

고택은 선생이 돌아가신 뒤 후손들이 17(현재 12)으로 중건한 양반 고택이다. 1987KBS드라마 <토지>의 최참판댁 촬영지였다. 최근에 끝난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주인공 고애신의 집으로도 나왔다.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의 사랑채

 

솟을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안채로 가는 일각문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넓은 마당에 높은 축대 위에 ''자형 사랑채가 있다. 안 사랑채로 이어지는 쪽담 아래에는 두 그루의 구불거리는 노송이 사랑채 누마루에 기대어 심겨 있다.

 

신발을 벗어 사랑채에 올랐다. 무거운 짐을 벗은 양 개운하다. 사랑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집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 사랑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큼직한 글씨가 집안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안채로 들어서는 문설주가 반질반질하다. 안채 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안채를 돌아 사랑채로 향했다. 마당 한쪽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굳센 기상을 드러내는 화단이 나온다.

 


함양 일두 정여창 고택 안채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 바로 여기다. 느림의 미학이 배여 있는 마을에서 느리고 우직한 삶을 살아간 선비를 만났다.

 


함양 일두 정여창 고택 사랑채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사랑 마당

 

자료 도움 : <한국의 서원(다른세상 출판사)> / <남명집(한길사 출판사) / <나의 서원 나의 유학(사람의 무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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