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한해의 절반 유월, 내일을 반갑게 맞이할 채비 하다 - 산청 남명기념관과 산천재를 찾아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6. 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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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해의 절반 유월이다. 올 초에 세운 계획도 잊어버렸다. 더운 날씨에 짜증도 밀려온다. 삶이 고단할수록 떠오르는 이미지는 한결같다. 일상에 지친 나를 위로받고 마음을 새로 잡고 싶었다. 그래서 산청으로 떠났다. 지리산으로 향했다. 칼을 품으며 평생 배운바를 실천하고자 살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을 찾아 나섰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산빛과 계곡 물빛이 여유를 먼저 안겨준다. 초록이 우거진 넉넉한 지리산 품에 안겨 들어가는 길은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한다.



산청 남명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성성문(惺惺門)


남사예담촌을 지나 덕산에 이르렀다. 오가며 본 맑은 풍경에 숨을 고른다. 남명기념관에 차를 세우고 성성문(惺惺門)을 들어섰다. 커다란 은행나무가 미끈하게 반기는 왼쪽으로 성생의 동상과 신도비, 사직소 등을 새긴 비들이 나란히 서 있다.



산청 남명기념관 은행나무에서 바라본 남명 선생 동상


잠시 은행나무 아래 앉아 땀을 훔쳤다. 숨을 고른 뒤 조선 시대 명종이 1555년 선생께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 비.선생의 유명한 을묘사직소를 읽었다.



산청 남명기념관 내에 있는 남명 선생 동상과 신도비, 사직소 등을 새긴 비들이 나란히 서 있다.


“~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큰 고목이 100년 동안 벌레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지 이미 오래입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산청 남명기념관 내에 있는 남명 선생 동상


~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산청 남명기념관


뉘라서 감히 임금인 명종을 고아에, 임금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에 비교하며 왕으로서 원칙을 세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산청 남명기념관에 들어서면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舍)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먼저 반긴다.


기념관으로 들어서자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舍)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먼저 반긴다.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신명사도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성곽으로 드러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경(敬)으로 설명하고 의(義)로써 실천하라 일러준다.


사진8. 산청 남명기념관에 전시 중인 선생이 허리춤에 찬 방울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인 성성자(惺惺子)와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를 새긴 경의검(敬義劍)


기념관에서 나와 길 건너에 있는 산천재(山天齋)로 향했다.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모형


산천재는 명종 16년(1561년)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으로 산천(山天)은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산청 산천재로 가는 길에 만난 단풍나무


가는 길에 단풍나무를 만났다. 빨갛게 물든 꽃이 싱그럽다. 기운을 북돋운다.

 


산청 산천재에 들어서자 지리산이 와락 안긴다.


산천재로 들어서자 지리산이 와락 안긴다. “죽은 소의 갈비뼈 같은 두류산(지리산)을 열 번이나 주파했다(頭流十破死牛脅·두류십파사우협)”고 할 정도로 십 수 차례 오르며 닮고자 했던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석종(千石鐘)

천 석들이 종을 보라(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 나지 않네(非大구無聲‧비대구무성)

어찌하면 두류산처럼(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산청 산천재에 뜨락에 있는 남명매(南冥梅)


마당 한쪽에 있는 매화나무인 남명매(南冥梅)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설매(雪梅)

한 해 저물어 홀로 서 있기에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이 내렸구나

선비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산청 산천재에 주련에는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선생의 쓴 시를 읽으면서 매화처럼 살고자 했던 마음을 엿보았다. 매화 옆 산천재 툇마루에 바람을 쐬었다. 주련에는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은하수처럼 십 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으리(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산청 산천재에 있는 벽화 3점 중 하나인 허유가 귀 씻는 그림(巢父許由圖)


주련 뒤로 벽화 3점이 보인다. 1818년 중건될 무렵 그림이 아니라 2006년 산천재를 새로 보수하며 그린 그림이다. 중국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산시성 성산에 은거한 동원공, 하황공, 기리계, 녹리 선생의 바둑두는 고사를 그린 그림(商山四皓圖)을 중심으로 이윤이 밭가는 그림(伊尹耕於有莘圖)과 허유가 귀 씻는 그림(巢父許由圖)이 오른편에 그려져 있다. 


중국 태성성대로 불린 임금 요가 천하를 허유에게 물려주려 하자, 받지 않고 자기의 귀가 더러워졌다며 영천에 귀를 씻고 기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는 고사를 형상화한 그림에서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 징사(徵士)였던 선생이 겹쳐 보인다.



산청 산천재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시물(남명기념관)


평생 산천재 왼쪽 창문에 ‘경(敬)’이라 써 붙이고 오른쪽 창문에는 ‘의(義)’라고 써 붙여두고 사셨던 선생은 “창문을 열어라. 아침 해가 너무나 청명하구나” 하며 돌아가셨다고 전한다. 


지붕 기와 사이로 노란 고들빼기가 순박하게 보인다. 덩달아 마음마저 깨끗하게 씻은 기분이다. 



산청 산천재 지붕 기와 사이로 노란 고들빼기가 순박하게 피었다.


칼을 품고 배운 바를 실천하며 살고자 했던 남명선생의 정신을 만났다. 선생의 삶을 통해 다시금 내 마음을 잡는다. 내일을 반갑게 맞이할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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