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가을의 깊고 푸른빛을 선물한다. 아마도 일상 속에서 바쁜 척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하려는 배려인 모양이다. 짧아서 아쉬운 가을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내 사는 진주에서 맑은 날이면 손 뻗으면 닿을 듯 병풍처럼 둘러쳐진 지리산으로 떠났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어머니 같은 지리산을 비단 나만 찾은 게 아니다.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년)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남명 조식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백운동 계곡물이 덕천강과 만나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
남명 조식 선생은 61세가 되던 1561년(명종 6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진주 덕천동 (산청군 덕산면)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1572년 2월 8일 7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 조식 선생 초상화
진주를 벗어나 산청 단성에 접어들면서 하늘은 더욱더 푸르다. 우리나라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인 남사예담촌을 지나자 지리산 계곡을 타고 내려온 덕천강은 졸졸졸 맑은소리와 함께한다. 덕산에서 4km 떨어진 곳에서 차를 세웠다. 도로 한편 주차장 옆에 입덕문(入德門)이라는 새겨진 바위가 있다. 남명선생이 삼가에서 덕산으로 오면서 천연 석문(石門)을 입덕문(入德門)이라 명명한 곳이다. 아쉽게도 길이 넓어지면서 옛 풍광은 사라졌다. 후대 사람들이 근처에 입덕정을 새로 만들고 암벽에 새겼던 각자를 떼어서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이다.
남명선생이 삼가에서 덕산으로 오면서 천연 석문(石門)을 입덕문(入德門)이라 명명한 곳이다. 아쉽게도 길이 넓어지면서 옛 풍광은 사라지고 현재는 후대 사람들이 암벽에 새겼던 각자를 떼어서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이다.
달곰한 바람이 와락 껴안는다. 어머니 치맛자락 같이 펼쳐진 지리산의 넉넉한 품에 안긴 기분이다. 어머니 같은 지리산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시천면이 나온다. 면 소재지로 들어서는 입구 오른편에 남명기념관이 나오고 길 건너에 산천재가 보인다.
남명기념관
산천재로 가는 길 한쪽에는 선조가 선생 영전에 내린 제문이 새겨진 비가 서 있다. 찬찬히 제문을 읽은 뒤 단풍나무들이 반기는 사이로 걸음을 옮기려는 데 시비(詩碑)가 한쪽에서 걸음을 세운다.
산천재로 들어가는 입구에 남명 선생이 산천재를 짓은 뒤 정자에 써 붙인 시 ‘천석종(千石鐘)’을 새긴 시비가 있다.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 없다오(非大구無聲‧비대구무성)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선생이 산천재를 짓은 뒤 정자에 써 붙인 시를 시 ‘천석종(千石鐘)’이다. 나즈막히 읊조리며 들어가려는데 마침 들어서는 입구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탄신 517주년을 맞아 남명선생의 사상과 학덕을 기리고자 오는 10월 19일부터 이틀간 산청군 시천면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일원에서 열리는 제42회 남명선비문화축제의 하나로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 등을 읽는 동안 더욱 지리산을 닮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제42회 남명선비문화축제 시화전 걸개그림이 산천재 입구에서 펼쳐져 있다.
산천재에 들어서자 아쉽게도 지리산이 보이지 않는다. 시화전 걸개그림이 어머니 지리산 품을 가렸다. 또한, 시화전 걸개그림이 호위무사처럼 남명매(南冥梅)도 둘러쌌다. 아쉬운 마음은 선생의 시‘설매(雪梅)’를 읊으며 달랬다.
산천재 뜨락에 있는 남명매(南冥梅)
‘한 해 저물어 홀로 서 있기에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이 내렸구나
선비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남명매를 지나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의 산천재 앞에 섰다. 처마 밑에는 그린 듯 쓴 전서체로 산천재(山天齋)라 적힌 편액이 있고 뒤편에도 해서체로 쓴 산천재 편액이 걸려 있다. 산천재는 『주역周易』 「산천대축山天大畜」괘에서 따온 말이다.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해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을 가진 산천재에서 정탁(鄭琢)·김효원(金孝元)·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顒)·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정구(鄭逑)·곽재우(郭再祐)·성여신(成汝信) 등의 제자를 가르쳤다.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가 되던 1561년(명종 6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진주 덕천동 (산청군 덕산면)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지은 산천재(山天齋) 주련에는 남명선생이 덕산에 터를 잡고 쓴 시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가 적혀 있다.
주련에는 선생이 덕산에 터를 잡고 쓴 시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가 적혀 있다.
‘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은하수처럼 십 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으리(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전서체로 쓴 산천재 편액 뒤에 해서체로 쓴 산천재 편액이 있고 중국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해 깊은 상산 속에 들어간 은둔한 네 현인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모습을 그린 <상산사호도>가 그려져 있다.
툇마루에 올라가면 해서체 ‘산천재’ 편액 바로 옆 정면에는 중국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해 깊은 상산 속에 들어간 은둔한 네 현인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모습을 그린 <상산사호도>가 있고 왼쪽에는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이, 오른쪽에는 버드나무 밑에서 귀를 씻는 선비와 소를 물가에서 끌고 가는 농부가 그려져 있다. 이른바 중국 요순시대 허유(許由)라는 선비가 요임금에게 나랏일을 맡아 달라는 말을 듣자 영천으로 달려가 귀를 씻었다. 소에게 그 물을 먹이려던 소부(巢父)도 “귀 씻은 물이 더럽다”라며 돌아섰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옮겨놓았다.
산천재에 편액 옆에는 중국 요순 시대 허유 고사가 그려져 있다.
문득 소 벽화를 보면서 선생과 정탁에 얽힌 일화가 떠오른다. 정탁이 진주향교 교수에서 물러나며 인사를 마치고 떠나는 그에게 선생은 집 뒤뜰 소 한 마리를 타고 가라고 했다. 뒤뜰에 없는 소를 타고 가리니 정탁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정탁이 말과 행동이 과격해 소처럼 느리게 오래 걸어야 멀리 갈 수 있음을 일깨워준 것이다.
산천재에 그려진 소 벽화는 문득 정탁을 떠올리게 한다. 정탁은 남명선생의 가르침대로 평생 소 한 마리를 마음속에 두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은 류성룡이지만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은 정탁이다. 이순신이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한양으로 끌려와 죽음에 이르자 적극 구명에 나서 백의종군하게 한 정탁은 선생의 가르침대로 평생 소 한 마리를 마음속에 두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산천재에서 바라본 지리산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경(敬)과 사리판별을 가장 옳게 행동으로 옮기는 의(義)를 가슴에 담아 실천했던 선생의 가르침이 천석종을 울린다. 십 수차례 오르며 닮고자 했던 지리산이 담 너머로 산천재를 내려다본다.
남명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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