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진주 도심에서 만나는 남명선생의 흔적 - 말티고개와 진주 객사 터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4. 2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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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초전동과 옥봉동을 연경하는 말티고개


어딜 가도 푸릇푸릇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궁둥이를 붙일 수 없다.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내가 사는 진주에서 흔적을 찾으러 4월 17일, 집을 나섰다.


진주시 초전동과 옥봉동을 연결하는 말티고개(말고개‧馬峴)로 먼저 향했다. 선생이 57세 되던 1558년(명종 13) 음력 4월 11일부터 25일까지 사천에서 바다를 통해 섬진강으로 올라가 지리산을 유람한 기록인 지리산여행기인 『游頭流錄』에 이곳을 지난 기록이 나온다.



진주 말티고개에서 바라본 월아산


11일 내가 있는 계부당(鷄伏堂)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랐다.~ 저녁 무렵에 진주에 묵으니, 일찍이 홍지(진주목사 김홍의 字)와 약속하여,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올라, 쌍계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말고개(馬峴, 일명 말티고개)에서 뜻하지 않게 종사관 이준민을 만났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집> 중에서)


선생의 흔적을 따라 금성초등학교 앞에서 말티고개를 넘어갔다. 한때 귀신 나오는 집으로 공중파에도 소개된 식당을 지나자 신동마을로 이정표가 나온다. 마을 이정표를 지나 곧장 말티고개 삼거리에서 좀 더 올라가자 노랑선씀바귀가 발아래에서 알은체한다. 녀석에게 인사를 건네고 좀 더 위로 올라가자 비봉산과 선학산을 연결하는 봉황교가 나온다. 봉황교로 올라가기 위해 잠시 길에서 벗어났다. 콘크리트포장을 걷어내고 탐방로를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비봉산이 흙길로 복원되어 우리 곁에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주 말티고개에서 있는 ‘귀신 나오는 집’이라고 몇 해 전 공중파 방송에도 소개된 곳.


들어서는 입구부터 금계화, 선비화라 불리는 골담초가 주황빛으로 반긴다. 꽃말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봉황교에 올랐다. 봉황교 주위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진주 말티고개에 바라본 진주 시내


미세먼지에 찌뿌둥한 하늘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이 탁 트인다. 내 뒤로는 달을 토해 낸다는 경치 좋은 월아산 봉우리가 부드럽게 따라온다. 선학산으로 향하는 일행의 모습이 싱그럽다. 연둣빛 물결이 이들을 감싼다.



진주 말티고개 주위는 연둣빛 물결이 포근하게 반긴다.


남명선생 일행은 말티고개로 오기 전에 도망친 노비를 잡아주었다.


‘문을 나서서 겨우 수십 걸음을 걸었을 무렵 어린아이가 앞으로 달려나와 고하기를 “도망친 종을 쫒아왔는데, 이 길 아래 쪽에 있으나 아직 잡지를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옹(愚翁, 황강 이희안의 字)이 재빨리 구사(지방의 관노비) 네댓 사람을 시켜 주위를 둘러싸게 하였는데, 잠시 뒤에 과연 남녀 여덟 명을 묶어서 말 머리에 데리고 왔다. 이윽고 말에 채찍질을 하여 길을 떠나면서 우리 두 사람은, “우연히 <어떤> 일을 했는데 이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이 무슨 조화 속이란 말인가?”라고 하면서 탄식하였다.(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집> 중에서)’


양반이었던 남명선생의 노비를 걱정하는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진주 말티고개를 넘어가면 나오는 옥봉 삼거리 오른편에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을 도와 거란의 60만 대군을 물리친 강민첨 장군을 모신 은열사가 나온다.


봉황교를 내려와 옥봉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 지나자말자 오른편에 진주 백성들이 건립한 진주 최초의 사당인 은열사가 있다. 고려 현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은열공 강민첨 장군(963~1021)의 탄생지로 강감찬 장군과 더불어 거란의 60만 대군의 침략을 물리친 분이다.



진주향청 터에서 바라본 진주 객사가 있던 곳.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진주중앙시장을 에둘러 도착한 곳은 진주중학교 앞 평안로터리. 옛 진주 도심의 번화가가 시작되는 곳이다. 근처 롯데인벤스 아파트는 몇 층인지 고개가 아파 셀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진주 객사터에 세워진 아파트 앞 은빛 트럼펫 모양의 조형물 위에 초록빛 개구리가 화답하듯 만들어진 조형물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아파트 앞 은빛 트럼펫 모양의 조형물 위에 초록빛 개구리가 화답하듯 만들어진 조형물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조형물을 지나자 아파트 한구석에 진주 객사터를 알리는 표지가 나오고 바로 옆에 이곳에서 발견한 옛 건물터 안내 선간판이 여기를 알려준다. 선간판 너머로 돌무더기 몇 개가 무심히 듬성듬성 놓여 있다.



아파트 한구석에 진주 객사터를 알리는 표지가 나오고 바로 옆에 이곳에서 발견한 옛 건물터 안내 선간판이 여기를 알려준다. 선간판 너머로 돌무더기 몇 개가 무심히 듬성듬성 놓여 있다.


지하 3층, 지상 22층으로 진주 최대 규모로 지어졌다는 아파트는 진주객사와 봉명루의 흔적을 삼켜버렸다. 오래도록 눈을 감고 선생의 시를 떠올렸다.



진주 객사(출처 : <사진으로 본 진주> 한국사진작가협회 진주지부)


‘기산(岐山‧중국 섬서성 기산현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주나라 문왕이 기산에서 거문고를 타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추었다 한다.) 아래 남은 소리 이 누각에 있는데/ 어질게 여기고 친하며 즐겁게 여기고 이롭게 여기는/ 뜻 지금껏 아련하구나/ 촉석성(矗石城)에다 새로 누각 세운 뒤부터는,/ 봉황새 울음소리 흐르는 강물 따라 오르내리는구나.(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집> 중에서)’



지하 3층, 지상 22층으로 진주 최대 규모로 지어졌다는 아파트는 진주객사와 봉명루의 흔적을 삼켜버렸다.


남명선생이 진주 객사의 누각인 봉명루(鳳鳴樓)에 올라 지은 시와 같은 분위기를 현재는 전혀 느낄 수 없다.



진주 객사터에 세워진 아파트 맞은 편은 진주 향청 자리지만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아파트 앞 건널목을 건너 오른쪽으로 걸었다. 갤러리아 백화점은 진주향청 자리였고 백화점 주차장은 교방청 자리였고 주차장 맞은 편 KT전화국은 동헌이 있던 곳이다. 걸음마다 닿은 역사가 그저 선간판으로만 남았다. 모두가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진주 객사 터 주위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앙상하게 가지치기를 당했다. 그럼에도 봄 햇살에 초록 잎을 틔웠다. 은행나무의 생명력을 엿보았다.


버스 정류장 한쪽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앙상하게 가지치기를 당했다. 그럼에도 봄 햇살에 초록 잎을 틔웠다. 은행나무의 생명력을 엿보았다. 사람과 시대를 잇는 흔적을 상상으로만 느껴야 하는 나를 달래준다.


만약 진주 객사와 동헌, 향청, 교방청이 그대로 남았다면 걸음마다 닿은 역사 가득한 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사람과 시대를 잇는 역사가 배어 있는 거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을지‧‧‧.부질없는 아쉬움은 발걸음을 남강으로 향했다. 마주한 진주성과 남강이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진주 남강과 촉석루

살포시 눈을 감았다. 촉석루 너머 비봉산에서 울리는 봉황 소리에 귀를 열었다. 날아간 봉황이 돌아오길 바라며 여기에 심은 대밭에서 대나무들이 ‘사각사각’ 봄바람에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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