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달빛 안내 받으며 지리산 찾아 나선 남명선생 흔적을 찾다-사천 쾌재정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4. 1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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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닮고 싶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1558(명종 13) 음력 410일부터 25일까지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으로 해서 지리산을 다녀왔다. 사진은 사천만.

 

지리산을 닮고 싶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은 무려 열한 번이나 지리산을 찾았다. 선생을 닮고 싶은 까닭에 선생이 찾은 지리산으로 향한 자취를 따라 사천으로 향했다. 선생은 57세가 되던 해인 1558(명종 13)에는 음력 411일부터 25일까지 사천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으로 해서 지리산을 다녀왔다. 410일 선생의 흔적을 따라 사천을 다녀왔다. 이때 지은 기행문이 <유두류록(遊頭流錄)>이다.

 


사천 읍내에서 진주시 금곡면 쪽으로 승용차로 10여 분 더 들어가면 만죽산 기슭 한적한 길가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멋스럽게 반기는 곳에 구계서원이 있다.

 

411일 합천 삼가 뇌룡사를 떠난 남명선생 일행이 사천에서 배를 타기 전에 먼저 들른 곳이 구암(龜巖) 이정(李楨) 선생의 집이다. 요즘이야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칼국수와 생선회, 경단, 절편 등을 융숭하게 준비해 대접했다. 구암 선생은 남명과 퇴계선생에게 배웠다. 구암 선생의 흔적을 찾아 먼저 구계서원으로 향했다.

 


구암 이정 선생을 모신 사천 구계서원

 

사천 읍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사천비행장으로 가기 전 배춘 삼거리에서 진주시 금곡면 쪽으로 승용차로 10여 분 더 들어가면 서원이 나온다.

 

만죽산 기슭 한적한 길가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멋스럽게 반긴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푸릇푸릇한 풍경이 정겹다. 오래된 역사 속으로 한걸음 내딛는 기분이다.

 


구암 이정 선생을 모신 사천 구계서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주위가 주는 푸릇푸릇한 풍경 덕분에 힘겹지 않다.

 

홍살문을 지나 계단 옆에 우뚝 선 은행나무를 지팡이 삼아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겼다. 정면 7, 측면 2칸의 이층집인 풍영루를 지나 동서재를 지나 곧장 사당인 구산사로 향했다.

 


사천 구계서원의 외삼문인 풍영루는 정면 7, 측면 2칸의 이층집이다.

 

내삼문인 중기문(重起門)을 지나면 사당 앞에는 두 기의 비석이 서 있다. 왼쪽은 미수(眉馬) 허목 선생이 글이 새겨져(구산사비龜山祠碑) 있고 오른쪽에는 성옹(醒翁) 김덕함과 함의재(涵義齋) 최관 선생의 기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잠긴 문 너머로 선생께 예를 올린 뒤 찬찬히 서원을 구경했다.

 


구계서원 내 구암 이정 선생을 모신 구산사 사당 앞에는 두 기의 비석이 서 있다. 왼쪽은 미수 허목 선생이 글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김덕함과 최관의 기적비가 건립되어 있다.

 

사천이 낳은 불세출의 천재로 불리는 구암선생(1512~1571)은 정치가이자 학자요 교육자다. 24세 때 유배온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를 만나 스승으로 삼고 학문을 익혔다.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1470-1550)에게도 공부를 배웠다. 25세에 대과에 장원급제했다.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에는 왕릉을 복원하고 김춘후, 설총,최치원을 모신 서악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30대에 정3품 통훈대부까지 지냈다. 더구나 그가 부임한 고을마다 송덕비를 세우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살폈다.



구계서원

 

퇴계와 남명 조식 선생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구암선생 50세때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만나러 갔을 때 장마로 들어갈 수 없자 퇴계선생이 직접 예안까지 나아가 맞이하고 함께 자고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구암은 남명선생이 사는 산청 덕산 산천재 옆에 집을 짓고 같이 살아보려고 할 정도였다. 남명선생과는 30년이 넘는 교분이 있었으나 하종악 후처 음행사건 처리를 둘러싼 갈등으로 말미암아 만년에 서로 절교했다.

 


구계서원 동재에 걸린 두 개의 편액 중에서 ()’()’라는 두 글자만 눈에 먼저 들어왔다. 실천하는 선비였던 남명선생이 평생에 걸쳐 한 말은 경의(敬義). ()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고, ()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사당 아래에는 유생들의 글방과 회의장이었던 동재(東齋 : 居敬, 明義齋)와 서재((西齋) : 講堂, 不欺堂)가 있다. 서재에 구계서원이라 적혀 있다. 동재에 걸린 두 개의 편액 중에서 ()’()’라는 두 글자만 눈에 먼저 들어왔다. 실천하는 선비였던 남명선생이 평생에 걸쳐 한 말은 경의(敬義)’. ()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고, ()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선생께서 평생 품었던 정신을 여기서 뵈니 반갑고 설렜다.

 


사천시 축동면 구호리에 있는 예전에 경로당으로도 쓰인 쾌재정이라 쓰인 슬래브 건물 앞에 할머니 한 분이 깨를 심고 있다.

 

툇마루에 앉아 고즈넉한 풍경을 안았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뺨을 어루만진다. 서원을 나와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배춘 삼거리에서 축동면쪽으로 향했다. 사천비행장 옆을 지나 하탑마을 장승들의 마중을 받으며 폐교된 옛 축동초등학교 구호분교를 지나 차를 세웠다.

 


고려 충신인 이순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무찌르고 왜구를 토벌했다. 이곳으로 유배 온 장군은 쾌재정을 지었다. 현재는 500년 넘는 푸조나무가 당시를 기억하게 한다.

 

마을에 들어서는 입구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70년대 풍경을 펼쳐보인다.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남해고속도로 바로 앞까지 차를 몰았다.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예전에 경로당으로도 쓰인 쾌재정이라 쓰인 슬래브 건물 앞에 할머니 한 분이 깨를 심고 있다.

 

건물 앞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이스크림처럼 해맑게 향나무와 옆으로 푸조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쾌재정(快哉亭)이라 쓰인 건물로 들어서자 창건자 이순으로 시작하는 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고려 충신인 이순(李珣) 장군은 고려 1361(공민왕 10)에 홍건적 20여 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개성으로 쳐들어올 때 예부상서로 태주에서 이를 격퇴했다. 강화도 교동(喬桐)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두 차례에 걸쳐 공신에 책록되었다.

 

1367년 신돈(辛旽)에 의해 이곳으로 유배되었을 때 쾌재정을 지었다. 아마도 왜구를 물리치며 통쾌하게 쾌재를 부른다는 뜻으로 쾌재정으로 짓지 않았을까.

 


사천 쾌재정 터 앞은 옛날 세미선(稅米船)이 드나들던 포구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무심한 차들은 바람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지난다.

 

마당에서 햇살에 샤워하듯 큰 기지개를 켠 뒤 좀 더 언덕 위로 올랐다. 고속도로 방음벽 가까운 곳에 수령 500년이 넘은 푸조나무가 지난 시간을 들려준다. 바로 쾌재정터 다. 이곳은 남명 조식 선생을 비롯해 퇴계 이황, 관포 어득강, 구암 이정 선생 등이 찾아 음풍농월하며 자연을 즐긴 곳이다.

 

옛날 세미선(稅米船)이 드나들던 포구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무심한 차들은 바람을 가르며 고속도로를 지난다.

 


사천 쾌재정 터에 있는 노거수는 지난 세월을 견뎌내 흔적을 드러낸다.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460년 전, 이곳을 찾은 남명선생을 떠올렸다.

 

온 몸에 바른 시멘트로 지난 세월을 이겨낸 노거수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눈을 감았다. 460년 전, 이곳을 찾은 남명선생을 떠올렸다.

 


사천만

 

“14일 인숙(이공량의 자()과 함께 강이(剛而구암 이정의 자)의 집에서 묵었다. 강이가 우리를 위해서 칼국수단술생선회찹쌀떡기름떡 등을 마련했다.

 

15일 또 강이와 함께 장암(場巖, 사천만의 가장 안쪽으로 사천강과 길호강이 합쳐지는 곳이다)으로 향하였다. 강이의 서제(庶弟)인 백()도 따라왔다. 먼저 옛날 고려조 장군이었던 이순(李珣)의 쾌재정에 올랐다.

 

~ 이날 밤에 달이 낮같이 밝고 은() 같은 물결이 거울을 닦은 듯하여 천근과 옥초가 온통 궤연 위에 놓여 있는 듯했다.

~ 홍지(김홍의 자)의 담요와 겹이불은 그 폭이 매우 넓어서 내가 처음에는 그 한 쪽을 빌려서 누워 잤는데, 점차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여 홍지를 자리 밖으로 밀어냈다. 이는 아마도 꿈속에 깊이 빠져서 스스로 자기 물건이 문득 남의 소유가 되는 줄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펴낸 <남명집> ‘유두류록중에서)”

 


사천 쾌재정 터에서 바라본 남해고속도로

 

입가에 웃음이 난다. 제 이불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계속 잠만 잔 진주목사 김홍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빛의 안내를 받으며 섬진강으로 향한 선생의 일행처럼 나 역시 바람에 몸을 맡겨 둥실 바다를 건너 간다.

 


남해고속도로가에 있는 사천 쾌재정 터는 남명 조식 선생을 비롯해 퇴계 이황, 관포 어득강, 구암 이정 선생 등이 찾아 음풍농월하며 자연을 즐긴 곳이다. 오늘 내가 찾은 자취도 포개진다.

 

장소에 시간이 쌓인다. 460년 전 남명선생의 흔적 위로 오늘 내가 찾은 자취도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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