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살처분 세상, “내 아이들 어쨌어?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6. 12. 17.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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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정, 28은행나무, 2014.- 를 읽고

 

책갈피는 53쪽에서 더 가지 못하고 멈췄다. 여러 날, 여러 달이 지났다. 고등학교 1학년인 큰 애의 책꽂이 꽂힌 책은 직장 책꽂이 한쪽에서도 있다. 아이에게 왜 읽는 게 진척이 없느냐는 타박에 재미가 없단다. “안에 사람 있는 거 확실합니까?”라고 묻는 53쪽의 첫 문장을 책 주인인 큰 애에게 묻고 싶었다. 왜 이 책을 샀는지 궁금했다. 개를 무척이나 키우고 싶어 하는 아이는 개 나오는 소설이라고 샀단다. 아이가 고른 책은 <28>이다.

 

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개 링고 말고도 몇 사람이 주인공이다. “코가 빨갛게 얼어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동공은 활짝 열린 채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할퀼 곳을 찾으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이 여자는 결혼했을까. 개 나이로 세 살은 거뜬히 넘겼겠는데.”라는 수의사 서재형이 신문기자 김윤주를 만난 첫 느낌을 묘사한 대목처럼 아이가 낯설어하듯 소설은 팀버 울프의 혈통을 이어받은 늑대개 링고를 비롯해 박동해, 노수진 등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독특함이 있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것처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낯설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생각으로 삶을 살아온 다양한 사람과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오히려 이 낯선 시선에 아이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아이 책꽂이에서 책을 뽑아 휘리릭 책을 넘겼다. 마치 책 속에 숨겨둔 비상금을 찾으려는 듯. 비상금 따위는 없었다. 넘겨가는 책에는 개백정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잊었다.

 

무더위가 절정으로 내달리는 7월 어느 날, 문득 파란색의 글자가 뱀처럼 휘감아 도는 음습한 듯 기분 나쁜 소설 <28>의 표지가 떠올랐다. 무더위를 식혀줄 책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쉬는 날, 선풍기 바람과 함께 읽었다. 괜히 읽기를 시작했다. 이 책은 내 기대와 달리 전혀 더위를 잊게 해주지 않았다. 또한 가족 모두 각자의 소중한 직장과 학교로 떠나고 나만의 휴식 시간을 여유를 전혀 주지 않았다.

<28>은 서울과 붙은 화양이라는 도시에 빨간 눈의 치사율 100%의 인수공통전염병이 발병해 도시가 군대에 의해 봉쇄된 28일의 기록이다. 나 역시 <28>에 하루 동안 봉쇄된 채 집에서 읽다가 지쳐 시원한 커피숍에서도 읽어나갔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 읽었다. 5시간여 만에 스스로 다짐하건대 내게 남은 나날, 그 점을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를 바란 495쪽 작가의 말을 끝으로 나도 <28>에서 풀려났다.

<28>은 쉽게 읽히지만, 더위를 식혀주지도 못한다. 때로는 역겹다. 소설의 잔인함에 역겨워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들은 잔인하다.

나도 첨엔 당신처럼 생각했죠. 우린 그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틀렸어요.”라고 말하는 양조위의 대사처럼 틀렸다. 화양 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당위성에 봉쇄는 당위성을 인정받았다. 봉쇄당한 화양 시민은 전염병 예방을 위해 생매장당하는 개들과 처지가 다를 게 없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서재형과 김윤주의 사랑은 생매장당한 개들을 살리기 위해 흙을 파는 링고와 스타의 사랑과 닮았다. 사람과 개를 떠나 두 커플은 지고지순하다. 문득 작가 정유정은 생매장당한 개나 국가에 봉쇄당한 화양 시민이나 똑같은 처지였듯 사람도, 개도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수의사로서 동물을 만날 때, 재형은 자신이 누군지 잊으려 애썼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못하면 그의 손에 놓인 생명은 대상으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생명을 목적이 아닌 대상으로 인식하는 인간이 얼마나 비열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학습한 바 있었다.”는 구절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물었을까.

 

살처분이라는 허울 속에 구덩이 속에 던져진 개들은 흙 속에서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꿈틀댔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꿈틀거렸다. 꿈틀거림이 멈추는 순간에 그 생명도 끝난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기 때문이다.

작가도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접하면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AI조류인플루엔자 발생으로 수천 마리가 넘는 닭과 오리가 살처분 당했다. 실제 감염 확인된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살처분’,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대로 처리한다는 생매장이다. 정부 당국은 전염을 막기 위해 대부분 예방 차원에서 한다고 한다. 나 역시 뉴스 등을 접하면서도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오리와 닭, 돼지, 소들을 그대로 불도저로 밀고가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쓸어 넣은 뒤 울부짖는 동물들 위로 흙을 덮어 죽여버린다. 우리의 이기심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을 애써 외면했다.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서 그저 동물을 죽였다고 위안했다.

<28> 속에 그려진 생매장당한 개들의 꿈틀거림 환상 때문에 1주일에 한 번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름에 튀긴 치킨을 안주 삼아 맥주를 들이켜는 내 즐거움은 한동안 사라졌다. 생매장당한 개처럼 AI조류인플루엔자로 살처분당한 수많은 닭의 비릿한 냄새가 한동안 내 속을 울렁거렸다.

 

바람이 지나간 곳에 다시 바람이 분다. 바람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나도 김윤주처럼 서재형의 묘를 찾아 돋을새김처럼 새겨진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를 어루만지고 싶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꾸고 싶다. “내 아이들 어쨌어?”라고 묻던 썰매 개 마야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실려 카랑카랑 들려올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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