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간 그가 그립다- 정유정의 소설<28>을 읽고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6. 10.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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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는 53쪽에서 멈췄다. 찬 바람 부는 겨울에서 시작해 초록빛이 싹트는 봄을 지나 무더위가 절정을 이룰 때까지 책갈피는 요지부동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의 책상에 꽂힌 책은 내 직장에도 있었다. 왜 이 책을 샀는지 궁금했다. 개를 무척이나 키우고 싶어 하는 아이는 개 나오는 소설이라고 샀다고 했다. 아이가 고른 책은 정유정이 쓴 소설 <28>이다.

 

개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개 아닌 사람 몇 명도 주인공이다. “할퀼 곳을 찾으면서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이 여자는 결혼했을까. 개 나이로 세 살은 거뜬히 넘겼겠는데.”라는 수의사 서재형이 신문기자 김윤주를 만난 첫 느낌을 묘사한 대목처럼 소설은 팀버 울프의 혈통을 이어받은 늑대개 링고를 비롯해 박동해, 노수진 등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독특함이 있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것처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낯설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생각으로 삶을 살아온 다양한 사람과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낯선 시선이 어려운 모양이다. 아들 책꽂이에서 마치 책 속에 숨겨둔 비상금을 찾으려는 듯 책을 뽑아 휘리릭 넘겼다. 비상금 따위는 없었다. 넘기는 책에서 개백정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잊었다.

 

무더위가 절정으로 내달리는 7월 어느 날, 문득 파란색의 글자가 뱀처럼 휘감아 도는 음습한 분위기가 나는 <28>의 표지가 떠올랐다. 무더위를 식혀줄 책일까 싶은 마음에 쉬는 날, 선풍기 바람과 함께 읽었다. 아이가 읽은 53쪽까지 한달음에 읽었다. 또한, 후회도 그만큼 빨리 몰려왔다. 책은 내 기대와 달리 전혀 더위를 잊게 해주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로 떠난 뒤에 오롯이 남은 나만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28>은 서울과 인접한 화양이라는 도시에 치사율 100%의 인수공통전염병이 발병해 도시 전체가 군대에 의해 봉쇄된 28일의 기록이다. 나 역시 <28>에 하루 동안 봉쇄된 채 어서 빨리 첫날 밤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새신랑처럼 끝을 향해 읽고 읽었다. 집 거실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에 엎드렸다가 그마저도 더워서 시원한 커피숍에서도 냉커피와 함께 읽었다. 5시간여 만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를 바란 495쪽 작가의 말을 끝으로 나도 <28>에서 풀려났다.

<28>은 쉽게 읽히지만, 역겹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들은 잔인하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서재형과 김윤주의 사랑은 생매장당한 개들을 살리기 위해 흙을 파는 링고와 스타의 사랑과 닮았다. 사람과 개라는 거죽을 떠나 두 커플은 지고지순하다. 문득 작가 정유정은 생매장당한 개나 국가에 봉쇄당한 화양 시민이나 똑같은 처지였듯 사람도, 개도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생명을 목적이 아닌 대상으로 인식하는 인간이 얼마나 비열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학습한 바 있었다.”는 구절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물었을까.

 

살처분이라는 허울 속에 구덩이 속에 던져진 개들은 흙 속에서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꿈틀댔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꿈틀거렸다. 꿈틀거림이 멈추는 순간, 그 생명도 끝난다는 것을 본능으로 알기 때문이다.

작가도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접하면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AI조류인플루엔자 발생으로 실제 감염 확인된 수는 얼마 되지 않는데도 수천 마리가 넘는 닭과 오리가 살처분 당했다. ‘살처분’,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대로 처리한다는 생매장이다.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오리와 닭, 돼지, 소들을 그대로 불도저로 밀고가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쓸어 넣은 뒤 울부짖는 동물들 위로 흙을 덮어 죽여버린다. 정부 당국은 전염을 막기 위해 대부분 예방 차원에서 한다고 했다.

 

나 역시 뉴스 등을 접하면서도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를 위해 소()가 희생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나는 다수를 위해 희생할 마음은 없었다. 나는 결코 그런 처지가 되지 않으리라는 자만이 가득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살고 싶지 않습니까?” <28>에서 그려낸 화양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는 1980년 광주처럼 봉쇄당한 광장에서 광주 시민들이 외쳤던 처절한 절규로 들렸다.

 

봉쇄당한 화양이라는 도시 이름에서 처음에는 양조위, 장만옥 주연의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먼저 떠올랐다. 같은 날 한 아파트로 이사 온 두 남녀가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외도하는 것을 알면서 외로움에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배우자가 있다는 도덕관념에 번민하다 헤어진다는 영화처럼 일탈이 끝나고 아무런 일 없었다는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나도 첨엔 당신처럼 생각했죠. 우린 그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틀렸어요.”라고 말하는 양조위의 대사처럼 틀렸다. 화양 시민 29만의 문제가 아니라 5천만 생명이 걸린 전쟁이라는 당위성에 봉쇄는 당위성을 인정받았다. 봉쇄당한 화양 시민은 전염병 예방을 위해 구덩이에 던져진 개들과 처지가 다를 게 없었다.

생매장당한 개들의 꿈틀거림 환상 때문에 1주일에 한 번은 아무렇지도 않게 기름에 튀긴 닭고기를 안주 삼아 맥주를 들이켜는 내 즐거움은 한동안 사라졌다. 생매장당한 개처럼 AI조류인플루엔자로 살처분당한 수많은 닭의 비릿한 냄새가 한동안 내 속을 울렁거렸다.

 

바람이 지나간 곳에 다시 바람이 분다. 바람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나도 김윤주처럼 서재형의 묘를 찾아 돋을새김처럼 새겨진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를 어루만지고 싶다.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서 그저 동물을, 우리와 다른 먹을거리를 죽였을 뿐이라 생각한 내 잘못을 빌고 싶었다.

내 아이들 어쨌어?”라고 묻던 썰매 개 마야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실려 카랑카랑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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