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찬솔일기

좋은생각 8월호 - 터놓고 마주 보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6. 7. 8. 17:17
728x90


예순을 앞둔 그가 읍내 가는 내게 이천 원을 건넸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심부름값으로 10퍼센트 주는 거 아시죠?”


그는 장날이면 직원에게 복권을 사 달라고 부탁한다. 휠체어에 의지해 사는 그에게 복권은 희망이자 일주일을 버티는 활력소다. 1등 당첨되면 심부름값 10퍼센트는 물론이고 주위 사람에게 한턱내겠다는 공약은 언제나 짱짱하다.


복지 시설에 있는 그는 여간 깔끔한 게 아니다. 불편한 몸으로도 자주 씻고 주위를 늘 깨끗이 정리한다. 한때는 그의 성격이 부담스러웠다. 부탁을 들어줄 때까지 바쁜 내 꽁무니를 쫒아다녀 귀찮기도 했다.


다행히 시를 쓸 땐 조용했다. 그는 강태공처럼 시를 적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자작시를 읽어 보라고 권했다. 나는 재촉하는 그에게 솔직한 평을 말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방으로 들어갔고, 한동안 자신의 시를 읽어 보라 권하지 않았다. 서로 데면데면했다. 여러 날이 지나 그가 다른 동료에게 건넨 시를 우연히 읽었다. 시는 예전보다 진솔했다. 먼저 알은체하며 칭찬하자 소풍 가는 아이같이 환하게 웃었다.


좋은 시를 읽게 해 준 답례로 바람 시원한 날 나무 그늘에서 캔 커피를 함께 마셨다. 지나가는 바람에 내 과거를 무심코 실었다. 나는 한때 주식에 빠져 신혼집 전세금을 날렸다. 지인들에게 거짓말로 돈을 빌리곤 아내와 연년생 두 아이, 배 속 아기를 나몰라라 하고 서울로, 대구로 숨어 살았다.



당시에는 꽉 막힌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밤에 경비로 일하면서도 낮이면 졸린 눈 비비며 컴퓨터 앞에 앉아 주식 그래프에 일희일비했다.


아내는 숨어 살던 나를 찾아왔다. 화도 내지 않는 아내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나를 어머니와 형네 가족이 말없이 받아 주었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우리 가족 다섯 명도 부대끼며 지냈다. 온갖 일을 전전하다 수년 전 이곳에 자리 잡고 평온을 찾았다.


며칠이 지나 그가 커피 한잔하자며 산책길로 이끌었다. 그는 파란 하늘에 살랑거리는 구름을 보며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십 대 초반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뤘지만 사업은 부도 직전이었다. 낚시 갔다가 술 기운을 빌려 차를 타고 낭떠러지로 향했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구했으나 대가는 가혹했다. 여생을 휠체어와 살아야 했고, 말도 어눌해졌다. 어렵게 꾸린 가정도 산산조각 났다.


그때 어머니 소원이 내 스스로 대소변 보는 거였는데...” 몇 차례 큰 수술 끝에 고비를 넘긴 그를 칠순의 어머니가 보살폈다. 그가 스스로 용번을 해결할 즈음엔 곁에 아무도 없었다. 의탁할 곳 찾다 여기 온 게 몇 해 전이다.


서로 과거를 털어놓고 나니 씁쓰레했던 커피가 달콤해졌다. 감춘다고 사라질 지난 날이 아니다. 아픈 과거를 잊지 않되 얽매이지도 말아야 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가올 장날이면 복권 사 달라며 돈을 건넬 그에게 심부름값을 미리 당겨 받아 커피 한잔 마시러 가자고 해야겠다.

 

(<좋은생각> 8월호에 실린 부족한 제 글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