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찬솔일기

영화 <올빼미>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

해찬솔 에나이야기꾼 2022. 11. 2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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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빼미> 보러 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역사적 사실

사극은 배경인 역사를 모르면 감동과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유해진, 류준열 주연의 <올빼미>는 조선 시대 인조 때 소현세자의 죽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소개 편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이지만 뛰어난 침술 실력을 지닌 경수는 어의 이형익에게 그 재주를 인정받아 궁으로 들어간다. 그 무렵, 청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8년 만에 귀국하고, ‘인조는 아들을 향한 반가움도 잠시 정체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러던 어느 밤, 어둠 속에서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경수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진실을 알리려는 찰나 더 큰 비밀과 음모가 드러나며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다. 아들의 죽음 후 인조의 불안감은 광기로 변하여 폭주하기 시작하고 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경수로 인해 관련된 인물들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라고 합니다.


인조(仁祖·1595년~1649년/ 재위 기간 1623년~1649년)는 누구?


1595년 선조 28년, 선조의 5남 정원군(인조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에게 왕의 칭호를 올려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했습니다)과 어머니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 씨의 큰아들입니다. 이름은 종(倧)이고 자(字)는 화백(和伯)입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쿠테타)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16대 왕에 오른 사람입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중종과 달리 직접 쿠데타에 참여한 왕이기도 합니다.


인조는 재위 중 2회에 걸쳐 외침을 받았습니다. 먼저 1627년 정묘호란입니다. 누르하치가 만주의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운 뒤 명나라와 중국 중원을 다투면서 후방에 있던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싸움에 패한 조선은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여진족이 1636년 다시 침략합니다. 병자호란입니다. 이 전쟁도 졌습니다. 청나라 황제에게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군신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때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가 볼모로 중국 청나라로 끌려갑니다. 8년 뒤 귀국합니다.

1649년 인조 27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죽었습니다. ‘헌문 열무 명숙 순효(憲文烈武明肅純孝)’라는 시호와 ‘인조(仁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았습니다.

어질다는 인(仁)과 달리 전혀 어질지 못한 패륜을 자행한 인조



영화에서는 인조가 자기 친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으로 나옵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편(인조 23년 6월 27일 무인 1번째기사)에 따르면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시신 덮는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고 사관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종친인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보고 말한 것이라 합니다.

실록에 기록된 죽은 시신의 모습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로 의심합니다. 세자가 병이 났을 때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診脈)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했다고 합니다. 볼모 생활했던 중국에서도 건강했던 젊은 세자가 이형익(李馨益)에게 세 번 침을 맞고 죽었다는 게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런 독살설에 기반해 낮에는 볼 수 없지만, 밤에는 희미하게 볼 수 있는 주맹증에 걸린 침술사 경수(류준열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든 사극 스릴러입니다.

독살설 주모자로 인조를 의심하는 이유


그럼 독살설의 주모자를 인조로 의심하는 이유는 우선 소현세자를 치료했던 어의 이형익을 전혀 국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헌부와 사간원 신하들이 이형익 등을 국문할 것을 건의했는데 인조는 "여러 의원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라며 거부합니다.

성리학을 떠받든 당시에 왕위 계승은 적장자가 계승하는 게 순리입니다. 소현세자가 죽었다면 손자인, 원손으로 책봉된 석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하지만 인조는 신하들의 건의를 거부하며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힙니다. 오히려 유배를 보내고 그곳에서 죽게 했습니다.

세자빈 강 씨와 원손 석철은 모두 인조에게 죽습니다. 1646년 1월 3일 전복구이에 독이 들었다며 세자빈 강 씨를 의심하고 별당에 유폐시켰습니다. 그해 3월 15일 강빈은 사저로 보내진 뒤 시아버지인 인조의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합니다. 원손이었던 소현세자의 장남인 석철은 동생들과 1647년 5월 13일 제주도로 유배하러 갔다가 1648년 9월 16일 죽었습니다.

소현세자는 독살이 아니라 지병으로 사망했다?


소현세자의 의문사에 대해 독살설 이외 새로운 의견들이 요즘 나오고 있습니다. 2010년 한국사학회 <사학연구>에 실린 부경대 신명호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그곳에서 병을 얻어 귀국해 죽었다’라고 합니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소현세자는 영구귀국 하기 훨씬 전부터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인질이 되어 1637년(인조 15) 2월 8일에 한양을 떠나기 전 이미 질병에 걸린 상태였다. 궁궐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생활하던 세자는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초에 여러 날을 淸軍의 막사에서 노숙하다가 병들었던 것이다. 4월 10일 심양에 도착한 후 소현세자는 한 달이 넘도록 질병에 시달렸다. 소현세자는 차도가 있는 듯싶다가 다시 병세가 악화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 귀국 중에 소현세자의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소현세자는 귀국 후에도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소현세자는 만주라는 환경적 요인 그리고 조선과 청 사이에 끼여 양쪽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심리적 압박감에서 병들었고 그 결과로 사망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럼 왜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죽였을까요?


중국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초기 반청 감정과 달리 새로운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 선교사 아담 샬 신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명분에만 집착하며 병자호란의 굴욕을 잊지 못하는 인조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볼모로 끌려간 이는 소현세자뿐 아닙니다. 중국 심양에는 세자빈 강 씨를 비롯해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 부부와 세자시강원 관원들과 내관, 시녀들이 있었습니다. 경비는 조선과 청에서 지원하는 물품으로 했습니다. 세자빈 강 씨도 중국에서 세자를 적극적으로 도와 청에서 자급자족하라며 나눠준 땅을 조선 포로들을 모아 농사를 짓고 잉여농산물로 장사도 했습니다. 조선에서 들여온 물품으로 무역하기도 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관소의 문전이 시장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성리학으로 똘똘 뭉친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이 곱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고려 시대 원나라 간섭기처럼 충선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아들 충렬왕으로 교체한 원제국처럼 인조도 왕위에서 물러나 세자로 바뀔 수 있다는 걱정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권력에 비할 수 없습니다.
권력을 욕심낸 인조가 빚은 불행한 가정사라고 생각합니다.


자료 도움 :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영화 <남한산성>,<올빼미>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