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아픈 과거의 흔적을 잊지 말라 알려주는 고마운 흉터- 남해 선소왜성, 장량상동정마애비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12. 5.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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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과거의 흔적을 잊지 말라 알려주는 고마운 흉터

- 남해 선소왜성과 장량상동정마애비


   

 

벌써 올해의 끝이 보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날의 기억은 점점 흐려집니다. 굳세 다짐도 잊기 쉽습니다. 손등의 흉터처럼 그날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도와주는 흔적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보물섬 남해군에는 더욱더 또렷한 흔적이 있습니다.

 


남해 선소왜성

 

남해읍 심천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5분 남짓 승용차로 더 들어가면 바닷가에 남해읍 선소리 선소마을이 나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윤산 천남대(天南臺)라 불리는 작은 언덕이 있습니다. 언덕으로 향하는 길목에 선소왜성으로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나옵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멋들어진 나무 한 그루가 반깁니다.

 


남해 선소왜성으로 올라가는 입구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세운 성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저 평범한 경작지가 나옵니다. 자세히 보아야 보입니다. 기단 역시 일본식입니다. 일본의 전형적인 성곽 축조법으로 60도에서 70도 각도로 쌓아 올린 성곽의 흔적이 드문드문 흔적을 보입니다.

 


남해 선소왜성은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세운 성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저 평범한 경작지가 대부분이라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선소왜성은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윤산 천남대(天南臺)라는 언덕에 1597년에 와카사카 야스히로가 축성했다고 합니다. 순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까 사위인 쇼 오시토시가 1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약 1년간 주둔한 곳이기도 합니다. 언덕의 정상부에는 성곽을 세 겹으로 쌓아 올린 천수각(지휘부)가 있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남해 선소왜성에는 일본의 전형적인 성곽 축조법으로 60도에서 70도 각도로 쌓아 올린 성곽의 흔적이 드문드문 보인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마을과 바다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일본군이 침략, 무수히 많은 조선 민중이 죽었습니다. 그날의 아픈 상처는 일상에 묻혀 희미해져 갑니다.

 


남해 선소왜성에서 바라본 마을과 바다 풍경

 

선소왜성을 내려와 본격적으로 마을로 향했습니다. 한때 200년이 넘은 팽나무가 멋들어지게 반겼다는 마을은 이제 덩그러니 정자만이 오가는 사람을 반깁니다.

 


남해 선소왜성 언덕 아래에 한때 200년이 넘은 팽나무가 멋들어지게 반겼다는 마을은 이제 덩그러니 정자만이 오가는 사람을 반긴다.

 

바닷가 근처에 차를 세웠습니다.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를 닮은 가을바람이 알은체를 하며 싱그럽게 이마를 살포시 만지고 갑니다.

 


남해 선소마을은 신선이 살았다고 선소(仙所)라고 불렸다고 한다. 배를 만들 지형은 아니지만 배가 많이 정박해 선소(船所)라 불린 듯하다.

 

마을은 신선이 살았다고 선소(仙所)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배를 만들 지형은 아니지만 배가 많이 정박해 선소(船所)라 불린 듯합니다. 마을 앞바다는 황금바다입니다. 자연산 피조개 전국 최고의 생산지를 손꼽히는 마을입니다.

 


남해 선소마을 앞바다는 황금바다다. 자연산 피조개 전국 최고의 생산지를 손꼽히는 마을이다.

 

부둣가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면 바다가 끝나는 부분에 커다란 둥근 바위가 나옵니다. 바위에 가로 131세로 253크기의 직사각형 비석 모양으로 파서 글을 새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인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 입니다. 덩굴 식물의 문양인 당초문(唐草文)으로 띠를 돌려 새겼습니다.

 


남해 선소왜성 언덕 아래에 있는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남해군 남해읍 선소리 192-9번지에 있다. 명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남해까지 와서 왜군을 무찔렀다는 명나라의 위대함을 암각(岩刻)한 전승시비(戰勝詩碑)12() 종서(縱書)로 된 마애비다.

 

1598(선조 31) 관음포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명연합 수군에 패한 일본군 500여 명은 관음포로 물러나면서 남해섬으로 올라와 선소왜성으로 도망쳤습니다. 일본군 패잔병들은 남해 선소마을 어민의 배를 훔쳐 타고 일본으로 도망갔습니다. 명나라 군대의 승리를 자축하고자 장수 장상량이 동정시를 써서 바위에 새겼습니다.

 


남해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는 덩굴 식물의 문양인 당초문(唐草文)으로 띠를 돌려 새겼다.

 

장량상 동정 마애비는 장량상이라는 명나라 유격대장이 글을 쓰고, 글 첫 줄에 동정시라고 적혀 있고, 자연 바위에 글을 새겨 마애비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남해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는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승리를 자축하고자 장수 장상량이 동정시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동정시(東征詩)”로 시작하는 마애비는 만력 26(1598) 늦가을에 나라의 동쪽에 다시 일이 있게 되었다. 때는 마침 조선이 왜놈들의 침입을 받아 7년에 이르렀다. 우리는 군사를 보내어 이들을 구원하였으나 아직도 이겼다는 보고가 없다. 천자께서는 벌컥 성을 내시어 곧 내각의 여러 고관에게 가서 군사들을 살펴보라고 명하시었다. ~ 이에 저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들은 섬 오랑캐를 물리쳐 폭동과 반란을 제거하고 최선을 꾀하였다. 모든 일은 반드시 싸워 이겨 여기에서 순리로 다스려 위엄이 이처럼 성하니 멀리 와서 정복하여 물리친 것을 밝혀 보이어 길이 알린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대상 목록에 마애비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워낙 큰 바위라 폭파하지 못했습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 위쪽에 있던 마애비 바위가 흘러내려 지금의 자리에서 멈췄다고 합니다.

 

이곳은 관광객의 발길이 잘 머물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동북아지역 나라들이 이 땅에서 벌인 전쟁의 흔적입니다. 우리는 그저 임진년에 왜구(왜놈)가 이유 없이 쳐들어와 벌인 난동(난리)이라는 뜻을 내포한 임진왜란 명칭을 사용합니다. 북한에서는 일본 침략자에 맞써 싸운 조선 인민의 임진조국전쟁이라 부릅니다. 일본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조선 출병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은 동원일역, 만력동원지역, 만력동정지역, 정왜원조, 만력조선역 최근에는 임진전쟁으로 칭하고 있답니다.




 


남해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대상 목록에 마애비도 포함되었지만 워낙 큰 바위라 폭파하지 못했다.

 

동북아 국제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전쟁 중에 입은 상처와 고통을 잊었습니다. 남해군 선소왜성과 장량상동정마애비(張良相東征磨崖碑)는 아픈 과거의 흔적을 잊지 말라 알려주는 고마운 흉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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