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 삽암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8.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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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녹색 물이 뚝뚝 떨어지는 터널 끝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최참판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차를 잠시 오른쪽 최참판댁 방향으로 세웠다. 조심스레 섬진강 쪽으로 걸었다. 가드레일을 넘어 섬진강 100리 테마 로드로 내려가자 평사리 마을 가는 길이라는 그림 지도판 옆에 장독을 닮은 조형물에는 전망쉼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섬진강 기갑사단이라는 정연홍의 시가 적힌 선간판도 있다. 탱크를 보았다/ 새벽녘, 기갑사단/ 강물을 끌고 내려오고 있었다/집게발 포신 치켜세우고/팡팡 물대포를 쏘며/ 머리통 내밀어 눈알 부라린다/ 각진 등딱지에 달린 철갑 이빨은/ 오래전 시간을 다듬어/ 물컹물컹 씹고 있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듯한 작은 전망대에서 두 눈을 꽉 채우는 풍광은 말이 필요 없는 절경이다.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길가로 올랐다. ‘슬로시티 하동 악양이라는 선간판 뒤로 바위 위에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남해 하동과 악양으로 가는 도로표지판은 선명하지만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은 우두커니 한쪽에 서 있다. 오가는 차에서는 물론이고 걷는 이들에게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안내판이 서 있다.

 

주민들은 섯바구라고도 부르고 선바위라 부른다는 삽암(鍤巖꽃힌 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안내판은 들려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옛날부터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곳이다. 고려 무신정권 때 한유한(韓惟漢)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하며 낚시로 소일하던 곳이라 한다. 후에 임금이 대비원녹사(大悲院錄事)라는 벼슬을 내리기 위해 신하를 내려보냈는데 창문으로 도망쳐 버렸다고 한다.

 

이후 한유한에 이야기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명은 1558(명종 13) 음력 411일 자신이 살던 합천 삼가를 떠나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청주목사 이정, 이공량 등 절친한 선비들과 진주, 사천을 거쳐 남해를 따라 섬진강 뱃길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닷새째, 배는 지리산 입구인 현재의 악양면에 이르렀다.

 

남명선생은 기행문에서 잠깐 사이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고, 강가에 삽암(鍤岩)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혼란해질 것을 예견하고 처자식을 데리고 와서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징초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는데, 하룻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 국가가 망하려 하니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착한 사람을 선양하는 정도에서 그친다면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가는 형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가득 따라놓고 거듭 삽암을 위해 길게 탄식하였다..” 라고 적었다.

 

남명선생은 이곳에서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한유한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한유한을 통해 자신이 걸어가야 할 처사의 삶을 다잡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위에 서서 강을 바라보는 내내 가슴이 벅차다.

 

섬진강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악양의 부자 이세립(李世立)이라는 사람이 한유한의 절개를 사모해 겼다 한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지리산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유람코스가 되었다.

 

현재는 아쉽게도 포장된 도로에서 보면 조그마한 바위에 지나지 않는다. 모한대와 관련 없는 2기의 비석을 정리했으면 한다.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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