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지리산 유람에 나선 남명 조식이 만난, 일두 정여창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8. 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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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악양 평사리 들판을 지나 쌍계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눈처럼 내리는 벚꽃이 피는 봄이 아니더라도 녹색 터널과 섬진강은 평안함을 안겨준다. 악양 동정호에서 6km가량 이른 곳에서 두꺼비 바위 쉼터와 은모래 쉼터 사이에 나는 차를 멈춰 세웠다. 섬진강변 섬진강 100리 테마 로드로 향했다.

 

나무들 사이로 차들이 쌩쌩 달리지만, 이곳 풍경은 모른척한다. 나 역시 모른 척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나무등걸에 기대어 앉아 잠시 대나무 너머 강도 훔쳐보고 마음속 땀도 닦는다.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세종32)~1504(연산군10)) 선생이 처자식을 이끌고 아예 지리산 악양으로 다시 들어가 18년간 은둔하며 학문을 강론했다는 악양정(岳陽亭)을 알리는 간판이 보이자 따라 좀 전과 달리 성큼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진분홍빛 배롱나무를 지나 마을 위쪽으로 향하자 허리 굽은 400년이 넘은 소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뻗은 악양정이 나온다. 주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현재의 누각은 선생이 지은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무오사화 이후 400년 동안 정각은 허물어졌다. 선생을 추모하던 지역 유림이 19014월에 3칸의 정각을 중건하고 1920년에 다시 4칸으로 중수하였다. 1994년 대대적으로 보수해 정면 4칸 규모로 5량 구조 현재에 이른다.

 

돌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외삼문으로 올랐다. 아쉽게도 마을에 들어선 집들에 둘러싸여 섬진강이 보이지 않는다. 문은 잠겨 있다. 악양정을 찾는 이는 연락하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만, 돌담을 따라 걸으며 때로 까치발로 안을 들여다보면서 선생을 떠올렸다.

 

한 마리 좀벌레(一蠹)’라고 호를 지은 선생은 18세에 부친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다 순국하자,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면서 받지 않았다. 1483(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안음(安陰) 현감을 지냈다.

 

선생은 술 마시고 않고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모친이 소를 보고 놀랐고 술을 마시지 말라 명하신 것을 따른 것이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두만강 근처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어 관노 생활을 하다가 1504(연산군 10) 음력 41, 55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문인들이 2달에 걸쳐 시신을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지냈는데 같은 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조선조 동방 5현과 동국 18현 가운데 한 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 향교와 9개의 서원에서 제향(祭享) 되고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지리산 유람에 나서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도탄에서 1리쯤 떨어져 정여창(鄭汝昌)선생이 거처하던 옛 집터가 남아 있다. 선생은 바로 천령의 유종(儒宗)이었다.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나라 도학에 실마리를 열어준 분으로 처자식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가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뒤에 교동주(喬桐主,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과 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며 지조를 목숨처럼 아낀 넋을 기렸다.

 

남명선생은 10층의 산봉우리 위에 다시 옥을 하나 더 얹어놓은 격이며, ‘천 이랑의 물결 위에 둥근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라며 드높였다.

 

악양정 돌담을 따라 거닐면서 남명선생이 지리산 기행에서 만난 일두 선생의 흔적을 통해 지조 있는 처사의 삶을 다짐했던 것처럼 선비의 체취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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