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2월 7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쌀쌀한 겨울,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나치 독일이 전쟁을 벌인 지 25년이 지난 뒤였다. 나치 독일에 가장 큰 피해를 당했던 폴란드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두 나라는 관계를 정상화했다. 문득 40여 년 전의 먼 나라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때문이다. 올해는 한일수교 50주년이다. 그러나 일본의 아베 정권은 아직도 일본군 성노예를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사과하지 않는다. 잊지 않겠다는 각오로 경남 사천 선진리성으로 6월 23일 떠났다.
경남 사천 용현면 ‘사천조명군총(泗川朝明軍塚)’가는 길은 벚나무로 터널을 이룬다.
더운 날이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진주를 벗어나 경상대학교를 지나 사천시 사천읍에 들어서자 항공우주산업 도시답게 땅을 박차 하늘을 오르는 비행기 조형물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시원한 풍경을 위한 삼아 진주-사천 국도를 타고 내려가다 용남고등학교 옆 선진 사거리에서 우회전했다. 새로 들어선 넓은 길을 마다하고 선진사거리에서 들어간 길 좌우에는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뤄 햇살의 더운 기운을 가려주었다. 사천온천랜드 입구를 지나 1.5km 정도 가자 큰 무덤이 나온다.
‘사천조명군총(泗川朝明軍塚)’이다. 야트막한 언덕 같은 무덤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참전군인기념비가 나온다. 기념비 옆으로 어른 키만 한 귀형상의 조형물이 나온다. 조형물 앞에는 귀 무덤, ‘이총(耳塚)’이라 적혀 있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 스님이 합심해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서 제사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했다. 이 무렵부터 나를 비롯해 많은 지역 사람이 조명군총을 ‘귀 무덤’으로 잘못 알고 있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 스님이 합심해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서 제사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했다.
일본의 귀 무덤도 사실은 코 무덤(鼻塚)이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전공품으로 조선 군민(軍民)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떠받드는 토요쿠니신사(豊国神社) 앞에 가져간 코와 귀를 묻었다. 무덤에는 희생당한 조선 군민의 12만 6,000여 명의 원혼이 머물고 있다. 무덤 위에는 희생된 조선인의 원혼을 누르기 위해 오륜석탑(五輪石塔)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코 무덤이 너무 잔인하다 여겨서 귀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1597년(선조 30) 동북아국제전쟁 때 경남 사천 선진리성(船津里城)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 결전을 벌이다가 희생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 군사들의 넋이 잠든 ‘조명연합군총’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울면 안 돼, 에비”라고 한다. 말속에 나오는 ‘에비’가 실은 왜군이 코와 귀를 베어 간 ‘이비(耳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간다’라는 말 속에 숨겨진 전쟁 속에 희생당한 넋 앞에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잠시 고개 숙여 넋을 위로하고 조명군총 앞에 있는 기념관인 덕승관(德勝館)으로 들어갔다. 덕승관의 덕승은 '得勝(득승)'과 중국어 발음이 같은 ‘더성(德勝)’이라는 명칭을 붙여 승리를 기원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한다. 기념관에서 동북아전쟁 연대기와 거북선의 첫 출전인 사천해전을 비롯해 이총에 관한 이야기도 살필 수 있었다.
국화과의 루드베키아(원추천인국)이 덕승관 옆으로 노랗게 피었다. 덕승관을 나와 조명연합군총으로 갔다.
일충문(一忠門)을 들어서자 왼편으로
‘새삼 덧없어라. 시간(時間)이란 무시종(無始終)의 바람결이며 그 수레바퀴에 실려 가 누누(累累)한 청사(靑史)의 책장 밖에서 민들레꽃 솜털인 듯 떠돌이 구름다운 무주원혼(無主怨魂)들이 구천어디메 오갈곳 없음인들 무릇 얼마리오. 저기 당병소(唐兵沼)와 사남(泗南) 화전(花田)의 병둔(兵屯)자리 및 왯골, 왯등 따위로 이름이 남았고 이 일대 선진신성(船津新城)터는 一五九七年 정유(丁酉) 재침(再侵)후 十二月 卄二日에 준공(竣工)시킨 왜장(倭將) 도진의홍(島津義弘)이 十여 달이나 차지했던 자취로서 어언 근 400년(近 四百年)의 춘풍추우(春風秋雨)동안 이곳 선진리(船津里)의 속칭 · 댕강무데기 · 아래 무언의 흙이 된 왜군 명병과 호국전몰(護國戰歿)의 사연들을 되살려 보련다.~’
로 시작하는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 뒤로 경상남도 기념물 제80호인 사방 36㎡의 사각형의 조명연합군총이 나온다. 흔히 ‘댕강 무데기’,‘당병무덤’으로 불렸던 이곳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船津里城)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과 결전을 벌이다가 희생된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 군사들의 넋이 잠든 곳이다. 현재는 음력 10월 1일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재침한 왜군은 소사전투와 명량에서 대패함으로써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동서 800여 리에 성을 구축하고 농성했다. 명나라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과 경상도우병사(慶尙道右兵使)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약 3만의 조·명연합군은 1598년 9월 19일 진주에서부터 차례로 왜군을 물리치고 사천읍성까지 탈환했다. 10월 30일(음력 10월 1일) 연합군은 선진리 왜성을 포위하고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연합군은 뜻하지 않는 화약고 폭발로 전열이 흐트러졌다. 왜군의 기습을 받아 수많은 전사자를 패배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7000~8000명의 연합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왜군 장수 시마즈(島津義弘)이 본국으로 돌아가 작성한 ‘도진가기’라는 책에는 3만2000명의 연합군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개망초가 ‘조명연합군총’ 무덤을 빙 둘러 계란프라이처럼 하얗게 피었다.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다. 한일수교 50주년인 올해 진정한 화해가 무엇인지 새삼 일깨운다.
승자와 패자의 기록이 다르다고 해도 수많은 이의 넋이 묻힌 것은 사실이다. '왜풀'이라고도 부르는 개망초가 무덤을 빙 둘러 계란프라이처럼 하얗게 피었다. 북미 원산인 개망초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온 귀화식물이다. 이제는 6~7월의 우리나라 여름경관이 되었다. 수많은 곤충과 야생조류의 서식처 구실을 하는 개망초 군락이 조명연합군 무덤을 외롭지 않게 둘러싸고 있다.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다. 한일수교 50주년인 올해 진정한 화해가 무엇인지 조명연합군총에서 새삼 일깨운다.
“~외로운 건 참을 수 없어/ 무리로 무리로/ 종소리 듣고 타고 내린 달빛처럼/ 허옇게 또 허옇게/ 내려앉고 내려앉아/ 잡초마냥 민초마냥/ 이 강산 여기저기/이렇게도 뒤덥는다~”( 박준영의 <개망초>중에서)
조창이었던 통양창자리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토성이다.
진정한 동반자로 개망초처럼 화해하고 살 수 있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무덤을 나와 다시 3분 거리에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토성이 나온다. 현재는 제방을 쌓아 간척했지만, 예전에는 물이 들었다고 한다. 시루떡 놓듯 흙을 다져 성을 쌓은 토성은 경남 서남부지역의 세곡을 수납해 해안을 경유 예성강 입구로 운반했던 조창이었던 통양창자리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의 출몰이 잦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다. 현재 1/5가량 복원한 토성은 선진리 왜성은 이를 토대로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토성을 나와 조금만 더 바닷가로 가면 선진리성이다.
선진리성 표지석 옆으로는 작은 비석이 세 개나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고적 81호였다가 해방 이후 사적 50호가 되었다가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지방문화재 274호로 격하된 시대의 변천이 비석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큼지막한 선진리성 표지석 옆으로는 작은 비석이 세 개나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고적 81호였다가 해방 이후 사적 50호가 되었다가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지방문화재 274호로 격하된 시대의 변천이 비석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성은 왜군 장수가 지낸 천수각 터를 비롯해 3년에 걸쳐 고증을 거쳐 사실 그대로 복원했다.
사천 선진리 왜성.
왜성은 조총이라는 무기의 체계에 맞춰 성(城)도 같이 발전을 이루었다. 성벽이 우리나라와 달리 누워 있는 형상이다. 성벽 위에는 도베이(흙담)이라고 하는 담장을 만들어서 뒤에 몸을 은폐한 채 사격을 가했다. 뱀이 똬리를 틀 듯 성벽을 여러 번 꺾어서 방어에 가장 유리한 성의 구조를 만들었다. 백 년간의 전투를 거치면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대적할 수 있도록 축성기술도 발전한 것이다. 옆으로 일렬로 들어갈 수 없어 꼬리를 물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직진이 안 되는 성문 앞에는 총포 구멍이 나 있었다.
동북아국제전쟁 때 왜성을 복원한 사천 선진리성에는 생뚱맞게도 고려 시대 사천으로 귀양 온 아버지 왕욱을 만나는 현종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 나온다.
성문을 지나자 생뚱맞게도 고려 시대 사천으로 귀양 온 아버지 왕욱을 만나는 현종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 나온다. 차라리 당시 조선 성곽과 왜성을 비교하는 조형물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시마즈 가문의 후손들이 이곳을 매수해 공원으로 정비하고 조상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해방 이후 비석은 파괴되었다. 1978년 공원 내에는 이충무공 사천해전승첩비가 세워졌다. 승첩비가 내려다 이는 바다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배치해 싸워 이긴 곳이다. 또한, 시마즈 가문이 세웠던 비석 터였던 천수각 터에는 한국전쟁 중 순국한 공군 장병의 위령비인 충령비가 세워져 있다.
사천 선진리성에서 바라보이는 사천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 배치해 싸워 이긴 곳(사천해전)이다.
선진리성 전투는 당시 왜군 처지에서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퇴각로를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전투에서 이긴 왜군은 전남 순천에 있던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힘을 합쳐 이순신·진린의 조명연합수군이 막고 있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로 500척이 넘는 대규모 함대를 몰고 나가 마지막 전투를 노량해전을 벌였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했다. 선진리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이겼다면 이순신 장군이 숨졌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성안을 거닐면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날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버리지만 ‘전쟁의 흉터’를 통해 어제를 마주하고 내일을 향해 가는 우리의 다짐이었으면 한다.
선진리성과 조명군총은 패전의 역사를 간직한 외면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전쟁의 흉터다. 그러나 수령 200~400여 년 된 벚나무 1,0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뤄 봄철에는 수많은 상춘객이 몰려오는 관광지로 바뀌었다. 벚나무 대신에 무궁화로 조명군총의 넋과 동북아국제전쟁을 올곧이 기억하면 어떨까. 아픈 과거도 국난극복의 현장으로 재조명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는 장소였으면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날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전쟁의 흉터’를 통해 어제를 마주하고 내일을 향해 가는 우리의 다짐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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