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진주여행)스승 찾아 가족 이끌고 천릿길을 내려온 수우당 최영경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5. 5. 1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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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신하의 제사를 지낸 경남 진주 상대동 선조사제문비를 찾아

 

이사는 진저리가 난다. 결혼하고 내 집을 마련하기까지 여러 번 옮겼다. 이삿짐을 싸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는 은근한 스트레스다. 그런데 아쉬울 것이 없는 살림을 가지고 탄탄하게 사는 사람이 서울을 떠나 천릿길을 마다치 않고 경남 진주로 왔다. 지나가면서 늘 궁금했다. 또한, 조선 14대 왕 선조가 신하의 제사를 지내준 이유가 알고 싶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514일 진주시청 뒤편 옛 도동길을 찾았다.

 

 

 경남 진주시 상대동 옛 도동길 안쪽에는 숯골이 있다. 이곳에 선조사제비문이 있다.

 

진주도동초등학교 지나 진주시립 연암도서관 못 미쳐 좁다란 입구의 갈색 이정표는 선조사제비문(宣組賜祭文碑) 150m'라 적혀 있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차 하나 지나다닐 정도로 입구는 좁았다. 입구를 지나자 제법 길이 넓고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었다. 지나칠 때 밖에서 본 풍경과 달리 안은 넓었다. 선학산 자락에 있는 마을은 숯골이다.

 

잘 지어진 기와집이 나오자 저 집인 줄 알았다. 다른 집안 재실이었다. 재실 옆으로 10걸음 정도에 비문이 있는 도강서당이 나온다. 서원 앞에는 수우당최선생유허비란 비가 먼저 반긴다. 사헌부 대사헌 수우당 최영경 선생의 유허비로 상대동 683번지에 세워져 있다가 이곳으로 이전해 세운 것이다. 유허비 옆으로 돌담 사이에 노란 고들빼기와 하늘빛 봄까치꽃이 정겹게 피었다. 서당 대문을 사이에 두고 유허비가 있고 맞은편에 신도비가 서 있다.

 

 

 선조사제비문이 있는 진주 도강서당.

 

서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점 물기마저 메말라버린 붉은 꽃이 붙어 있는 동백 곁을 지나 선조사제문비로 갔다. 그런 나를 흰 개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내 지켜보았다.

 

수우당 최영경 선생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온 집안이다. 아쉬울 것이 없던 문벌 출신의 서울 사람이었던 최영경은 1565년 지리산으로 실천하는 남명 조식 선생을 찾아 제자가 됐다.

 

 

도강서당 옆은 진주 선학산 자락이라 한적한 느낌이 정겹다.

 

남명선생은 실천하는 유학자였다. ‘경의(敬義)’를 스스로 일깨워 실천하기 위해 허리춤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 부르는 한 자루의 단검이 늘 차고 다녔다. 걸을 때마다 방울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이다. ‘내명자경(內明者敬)’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진 경의검은 안으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고, 바깥으로는 결단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라는 뜻이다. 옮고 그름을 제대로 배워 실천하라는 선생의 뜻이 칼에 아로새겨져 있다.

 

 

선조가 수우당 최영경을 제사지내기 위해 하사한 제문을 돌에 새겨 제문비.

 

남명선생의 이런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수우당은 천릿길을 마다치 않고 가족을 이끌고 내려왔다. 맹자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못지않은 배움에 관한 열정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자세가 일깨운다.

 

선조가 1591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하였지만 사직소를 올리고 입궐하지 않았다. 1589(선조 22) 102(양력 1118)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연명으로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게 전주를 거점으로 한 정여립의 역모를 알리는 보고서를 올렸다. 조선 중기 사림을 뒤흔든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시작이었다.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정쟁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1000여 명의 선비가 역모와 관련되어 죽거나 유배되었다.

 

 

도강서당 마루에서 바라본 청풍사

 

선생도 이때 연루돼 서울로 압송됐고 옥중에서 바를 정()자를 크게 쓴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591년 선생이 무죄로 판명되자 선조는 1594년 예조정랑 정홍좌(鄭弘佐)편에 제문과 제물을 진주로 내려보내 제사를 지냈다. 1821(순조 21) 선조가 하사한 제문을 돌에 새겨 제문비를 세웠다. 원래는 남명 조식 선생의 정조사제문비와 함께 산청 덕천서원(德川書院)에 있던 것을 현재의 진주 상대동 도강서당(道江書堂)으로 옮겼다.

 

왕이 신하를 위해 제문을 짓는 예는 극히 드물다. 문화재의 가치가 있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8호로 선정했다. 제문비는 몸돌의 크기 높이 172, 70, 두께 20이다. 제문의 자세한 내용은 한자 실력이 짧아 아쉬움을 남겼다. 나중에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원을 찾아 달래볼 참이다.

 

 

 수우당 최영경 선생의 위패를 모신 청풍사

 

제문비를 보면서 선조가 떠올랐다. 조선 11대 왕인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의 9번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선조다. 조선 최초의 방계(傍系) 출신 왕이다. 선조를 무능하다고 욕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조는 꿈도 꾸지 못한 왕위에 올랐다. ‘정통성 콤플렉스를 사림의 동인과 서인 분열을 이용해 대신들을 장악한 뒤 41년을 집권했다. 재능을 자신의 집권 안정만을 위해 활용한 것이다. ‘정여립 모반사건도 그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런 까닭에 연루되었다고 옥사하게 만든 뒤 제문을 지어 죽음을 애도하며 반대편을 견제했을 것이다.

 

 

서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흰 개 한 마리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동백꽃은 뚝뚝 떨어져 흔적조차 없지만 좁고 예리한 톱니 모양의 잎은 향초처럼 제문비 옆에 서 있다. 도강서당 대청마루에 올랐다. 소나무 가루가 얉은 초록 이불처럼 깔렸다. 한쪽 구석에 심야에 배달해 먹은 듯 중국음식점 스티커가 보인다. 그런 사이에도 흰 개는 담 너머에서 나를 본다. 내가 녀석을 바라보자 태연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러다 다시 나를 쳐다본다. 다행히 크게 짖지는 않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서당 앞 뜰에는 말라비틀어진 민들레가 외롭게 서 있다.

 

위패를 모신 청풍사로 걸음을 옮겼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계단 사이에 별꽃으로 피었다. 멋진 테두리를 가진 나뭇잎이 향초처럼 빛난다. 돌아보았다. 서당 뒤편에는 여러 목침이 한쪽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수북이 쌓여 있다. 바둑판이 그 쓰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풍사 문을 열고 잠시 묵례(黙禮)로써 예를 올렸다. 뒤편에는 드문드문 애기똥풀이 노랗게 피었다. 청풍사의 편액처럼 시원하고 맑은 바람(淸風)이 불어 구린내 나는 세상, 날려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골목 어귀에서 만난 고들빼기처럼 내가 찾은 선조사제문비에서 요즘 어지러운 사회 현실 속에서 기운을 돋우고 간다.

 

서당을 나왔다. 오고 가는 사람 구경하는 듯 골목 한쪽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며 수우당 선생도, 서당 존재도 몰랐다. 최 씨 집안 재실으로만 알고 있었다. 궁금한 것을 남겨두고 돌아서려니 서운했다. 괴불주머니가 종처럼 바람에 흔들흔들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넨다. 괴불주머니 앞에는 고들빼기가 노랗게 피었다. 무더운 여름날 입맛까지 뚝 떨어지질 때 쌉싸름한 맛이 입맛을 돌아오게 한다. 고들빼기처럼 내가 찾은 선조사제문비에서 요즘 어지러운 사회 현실 속에서 기운을 돋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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