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삼가면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지와 뇌룡정
바람이 세찼다. 겨울 잠바를 입었는데도 춥다. 문밖을 나서면 추위가 으르렁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가고 싶었다. 작은 불 하나가 공간을 따스하게 데우고 우리 삶을 밝히듯 뜨거운 열정 같은 불을 가진 그를 만나러 1월 18일 집을 나섰다. 새로운 다짐을 새기는 1월. 더욱 그를 만나 새해 결심을 굳건하게 하고 싶었다.
진주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이 굽이 돌아가는 남명선생의 생가지이자 외가인 토동(兎洞)은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吐里)에 있다. 마을은 너른 들판이 감싸고 있고 강이 크게 원을 그리듯 돌아간다. 산은 이 모두를 둥글게 안았다.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양(玉免望月)이다.
경남 진주에서 합천 가는 3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의령군 대의면 소재지로 빠지는 대의교차로에서 빠져나와 합천대로 방향으로 가다가 외토 방향으로 들어가면 2km 거리에 남명 조식 선생 유적지가 나온다. 굴다리 밑으로 들어가자 남명선생 유적지 입구를 알리는 비석과 남명로라는 길주소 안내판이 먼저 반긴다.
진주 남강의 지류인 양천강이 굽이 돌아가는 남명선생의 생가지이자 외가인 토동(兎洞)은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吐里)에 있다. 그러나 의령군과 산청군 경계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지지 않았다. 남명교 앞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마을은 너른 들판이 감싸고 있고 강이 크게 원을 그리듯 돌아간다. 산은 이 모두를 둥글게 안았다.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양(玉免望月)이다.
남명선생 생가지 입구에는 45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반긴다.
남명교에서 잠시 외톨이 마을 풍경을 둘러본 뒤 다리를 건넸다. 45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을 입구에서 반긴다. 느티나무 옆에는 ‘이곳은 조선 중기 실천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1~1572) 선생이 출생하여 ’경의(敬義)‘의 학문을 완성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로 시작하는 남명로(南冥路) 안내판이 나온다.
선생은 합천군 삼가면 외톨이 토동(兎洞,톳골)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벼슬길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주로 서울에 살았다. 26세 때 아버지가 별세하자 고향인 삼가면 하판리 지동(枝洞,갓골)에 장사지낸 뒤 삼 년 동안 무덤 근처에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켰다. 이후 30세부터는 처가인 김해에서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별세하자 역시 고향인 지동 아버지 묘소 동쪽에 장사를 지낸 뒤 삼 년 동안 묘를 지켰다. 48세에 삼가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선생이 61세에 산청 덕산으로 가진 전까지 학문을 체계화하고 후진을 양성한 곳이란다.
나무 옆에 ‘홀로 선 나무를 읊다(詠獨樹)’라는 선생의 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무리를 떠나 홀로 있기에(離群猶示獨)/ 스스로 비바람 막기 힘들겠지(風雨自亂禁)/늙어감에 머리는 없어졌고(老去無頭頂)/ 상심하여 속내가 다 타버렸네(傷來燬腹心)/ 아침에는 농부가 와서 밥 먹고(穡夫朝耦飯)/ 한낮에는 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瘦馬午依陰)/ 다 죽어가는 등걸에서 무얼 배우랴(幾死査寧學)/ 다만 하늘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네(昇天只浮沈)’
‘외토리 쌍비’는 남명의 외할아버지인 이국의 고조부 이온(李榲)의 효성을 적은 효자비와 백비(白碑)다. 고려 공민왕 때 이온이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자리’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이온이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묘역에서 기거한 사실을 적었다.
남명선생 쓴 시를 읊조리며 느티나무를 보고 마을을 보았다. 시비 옆으로는 흔히 ‘외토리 쌍비’라고 널리 알려진 비각이 나온다. 비각 안에는 남명의 외할아버지인 이국의 고조부 이온(李榲)의 효성을 적은 효자비와 백비(白碑)가 나온다. 고려 공민왕 때 이온이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자리’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이온이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묘역에서 기거한 사실을 적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온 부부는 효성이 지극했으나 살림이 가난해 부모 봉양이 매우 힘들었다. 하루는 부부가 부모 봉양을 위해 앞뜰에서 모심기 품팔이를 하는데, 별안간 동남풍이 불어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우레가 천지를 진동하고 공중에서 괴이한 궤짝 하나가 떨어졌다. 모심던 사람들이 놀라 궤에 몰려들었으나 아무도 열지 못했다. 다만 부부는 힘 안 들이고 열었다. 궤 속에는 쌀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신명이 감동하여 떨어진 것이라 여기고 부부에게 주었다. 기이하게도 3년 동안 쌀이 꿰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칼을 찬 선비 남명의 숨결> 중에서)’
남명선생 생가지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
쌍비를 지나 길 건너 뇌룡정을 저만치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 곧장 토동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 앞에는 나락 수매가 있는지 나락 포대가 쌓여 있다.
마을회관으로 어르신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회관을 지나 마을 속으로 들어가자 묻지도 않았는데 지나가는 할아버지는 좀 더 올라가자 안내판 나오면 꺾인 골목으로 들어가라며 생가지를 일러주었다. 마을회관에서 50m가량 올라가다 안내판이 나오고 그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돌담길 따라 새로 지은 기와집이 보인다. 새로 지은 기와집 아래는 마당 넓은 기와집이지만 빈집이다.
남명선생 생가는 1971년도 이른바 ’새마을 사업‘ 때 철거해 폐허로 남았다가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최근래 복원했다.
생가지(生家址) 안내판에는 ‘~선생이 태어난 이곳의 건물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 건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71년도 이른바 ’새마을 사업‘ 때 철거하여, 지금은 폐허로 그 흔적만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국가 시책에 따른 역사 유적 파괴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고 적혀 있다.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최근래 복원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채 옆에 큰 키의 굴참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덩그러니 건물만 있어 텅 빈 마당과 함께 을씨년스럽다. 다행히 주위 대나무들이 바람에 사각사각 소리 내어 반긴다. 대청마루에 올라서 살며시 방을 들여다보자, 햇살이 방으로 들어와 사방으로 흩어져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남명선생은 부모가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같이 꾼 뒤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나던 그때 집 앞 우물에서 무지개가 솟아오르고 방안에는 찬란한 보랏빛 광채가 가득했다고 한다.
‘선생 외가 집터는 명당이었다고 한다. 어느 예언가가 점치기를 신유년(1501년)에 태어나는 이는 커서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이다로 했다 한다. 남명의 외조부는 그 터에 새로 집을 지어서 자기 손자가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명의 부모가 처가에 와서 그 집에서 잠을 자는데,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같이 꾸었다. 그로부터 남명의 어머니에게는 태기가 있었는데, 예언가가 말했던 것과 같이 신유년의 음력 6월 26일 진시(오전 7시~9시)에 남명을 낳았다. 태어나던 그때 집 앞 우물에서 무지개가 솟아오르고 방안에는 찬란한 보랏빛 광채가 가득했다. (<남명 조식> 중에서)’고 한다.
이온 선생을 추모하는 합천 용연사와 인천 이씨 재실
생가지 주위를 둘러본 뒤 마을회관으로 나왔다. 마을회관에서 길 건너 강 쪽으로 걸었다. 이온 선생을 추모하는 용연사(龍淵祠)가 나온다. 1580년 서원이 들어섰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된 뒤 1910년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용연사 대문인 ‘효천문’이 닫혀있어 까치발로 잠시 둘러본 뒤 강둑으로 걸었다. 강둑 오솔길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갈대의 흰빛 군무가 함께한다. 역광을 받아 빛나는 갈대처럼 풍광이 그윽하고 따스하다.
용암서원 앞에 있는 남명 조식선생 흉상
불과 50m 거리에 뇌룡정과 용암서원이 나온다. 용암서원 앞에는 선생의 흉상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흘러가는 강과 바람을 바라본다. 흉상 옆에는 1555년 조선 명종이 내린 단성현감직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을묘사직소)가 새겨져 있다. 사직상소를 받은 갓 스물의 명종은 상소문의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을 한 고아에 불과하고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구중궁궐의 한 과부라고 한 내용에 격분했다. 결국, 언로를 막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명종은 벌을 줄 수 없었다.
용암서원 앞에는 1555년 조선 명종이 내린 단성현감직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을묘사직소)가 새겨져 있다.
“~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큰 고목이 100년 동안 벌레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지 이미 오래입니다.
~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멋대로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 같습니다.
~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용암서원 정문인 외삼문에는 ‘집의문’이라는 현액이 걸려있다.
따사로운 햇살을 등 뒤로 응원받으며 국역 상소문을 천천히 읽었다. 절망의 시대, 더욱 그분이 그립다.
집의문(集義門)이란 현액이 걸린 외삼문을 지나 용암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용암서원은 선비들이 남명 조식 선생을 제사 지내며 공부하던 곳이다. 1576년 노흠, 송희창 등이 의논하여 가회면 장대리에 세운 회산서원이 전신이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 황강 주변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복원되었다가 1699년 용암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복원했다.
용암서원
강당인 거경당(居敬堂)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양옆에 있고 서재와 거경당 사이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선생 신도비명 중 본문만 적은 용암서원 묘정비가 있다. 내사문을 지나 사당인 숭도사에 이르렀다. 위패에는 직위가 ‘처사’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창문을 열어라. 아침 해가 너무나 청명하구나”하며 돌아가신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였던 선생은 “나를 처사(處士)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내 평생 뜻이다. 처사라고 쓰지 않고 관직을 쓴다면 이것은 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병시중을 들던 제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용암서원 내 남명 조식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는 선생의 직위가 처사라 적혀 있다. 선생은 “나를 처사(處士)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내 평생 뜻이다. 처사라고 쓰지 않고 관직을 쓴다면 이것은 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병시중을 들던 제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서원 앞 뇌룡정으로 향했다. 정자는 선생이 계부당(鷄伏堂)과 함께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그런데 안내판에 계부당(鷄伏堂)을 ‘계복당(鷄伏堂)’이라 잘못 적어놓았다. 48세에 처가인 김해에서 본가로 돌아온 선생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이 많아 결국 학생들이 공부할 집과 숙식할 집을 따로 지으며 계부당이라 했다. ‘닭이 알을 품어서 병아리가 부화하여 나오듯 차분히 침잠하여 학문과 인격을 함양한다.’는 뜻이다.
뇌룡정 기둥에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이라고 적혀 있다.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 낸다'라는 뜻이란다.
뇌룡사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탄 뒤 복원되지 못하고, 1678년 합천군 봉산면 계산에 있었던 용암서원 부속 건물인 뇌룡정으로 재건되었다가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1883년 허유, 정재규 등 삼가의 유림이 원래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담장 쪽문으로 들어갔다. 뇌룡정 기둥에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연묵이뢰성(淵默而雷聲)이라고 적혀 있다.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 낸다'라는 뜻이란다.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리라는 선생의 가르침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의병장 곽재우·정인홍 같은 제자에서 엿볼 수 있다.
뇌룡정(사진 오른쪽)과 용암서원
뇌룡정은 강둑을 넓히면서 들판으로 옮겨 새로 지었다. 옮기기 전의 운치와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남명선생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닮았다. 선생이 떠난 지 400년이 넘었다. 실천을 중시한 선생의 가르침은 다시금 이 땅에서 이글거려 새로운 역사를 쓰도록 이끈다. (사진은 남명선생 생가지)
역사는 사람이 만든다. 대한민국 역사는 다시 쓰이는 중이다. 남명 조식 선생은 현실정치를 경멸하며 재야에 머물면서도 은둔가에 머물지 않았다. 늘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비판했다. 작은 불 하나가 공간을 따스하게 데우고 우리 삶을 밝힌다. 뜨거운 소망을 담은 불에 단단한 쇠가 녹는다. 남명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닮았다. 선생이 떠난 지 400년이 넘었다. 실천을 중시한 선생의 가르침은 다시금 이 땅에서 이글거려 새로운 역사를 쓰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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