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백성을 물로 본 칼 찬 선비, 경남 산청 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를 따라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1. 20. 06:30
728x90

 

백성을 물로 본 선비가 있다. 백성들 마음은 위험하다 말하지 말라고 한 선비는 칼을 찼다. 심지어 방울도 달았다. 선비는 조선 시대 선조를 위해 <민암부>를 지었다.

‘~배는 물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임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편안하게 되기도 하고, 임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위태롭게 되기도 한다네. 백성들의 마음 위험하다 말하지 마소. 백성들의 마음은 위험하지 않다네.’

 


백성을 물로 본 선비가 있다. 백성들 마음은 위험하다 말하지 말라고 한 선비는 칼을 찼다. 심지어 방울도 달았다. 선비는 조선 시대 선조를 위해 <민암부>를 지었다. 그는 남명 조식 선생이다. 남명기념관에 있는 남명 조식 상()

 

최순실 국정논단으로 암울했던 2016년 한해도 저물었다. 새해가 밝았다.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지 1228일 경남 산청 덕산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산청군 단성면을 지나 점차로 지리산이 가까워질 무렵 차를 세웠다. 덕산에서 4km 떨어진 곳이다. 지리산으로 가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한편에 주차장에 있고 산기슭에 입덕문(入德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시대 명종 6(1561) 남명 조식 선생이 삼가에서 덕산으로 오면서 천연 석문(石門)을 입덕문(入德門)이라 명명한 곳이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옛 풍광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한 지역민들이 입덕문 보승계를 만들어 입덕정을 신축하고 암벽에 새겼던 각자를 떼어서 현재 자리로 옮겼다.

 


조선 시대 명종 6(1561) 남명 조식 선생이 삼가에서 덕산으로 오면서 천연 석문(石門)을 입덕문(入德門)이라 명명한 곳이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옛 풍광을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 한 지역민들이 입덕문 보승계를 만들어 입덕정을 신축하고 암벽에 새겼던 각자를 떼어서 현재 자리로 옮겼다.

 

입덕문 바위 옆으로는 꽉 다문 사람 모양의 돌멩이 앞에 누가 기원을 올렸는지 과일과 차가 너부러져 있다. 근처에는 생활 쓰레기도 덩달아 버려져 있다. 주차장을 나와 입덕정으로 향했다. 입덕정에 올라 시원하게 흘러가는 물소리에 넋을 놓다가 지나가는 새소리에 정신 차려 다시금 길을 걸었다. 덕으로 들어가는 길 왼편으로는 지리산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간다. 물을 벗 삼아 5분여 걷다 보면 십 수명이 앉을 수 있는 널따란 바위가 나온다. 탁영대(濯纓臺). 벼랑을 돌아 물가로 내려갔다. 비록 갓끈을 씻지는 못할 지랄도 내 묵음 마음이라도 씻을 요량으로 주위 산천을 둘러보았다.

 


산청 입덕문에서 5분여 걷다 보면 십 수명이 앉을 수 있는 널따란 바위가 나온다. 갓끈을 씻는다는 탁영대(濯纓臺)가 나온다.

 

탁영대를 나와 다시 덕산으로 향했다. 덕산 입구에 있는 남명기념관 앞에 차를 세웠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몇백년 묵은 산수유나무들이 반기고 왼편으로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은행나무 너머로 남명 조식 선생 상()이 보인다. 선생 조각상 좌우로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와 우리 글로 옮긴 상소문을 적은 비가 연달아 4개가 나온다.

 


남명 선생 동상과 신도비, 을묘사직소 국역비 등이 남명기념관 앞에 세워져 있다.

 

명종이 (1555)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본을 찬찬히 읽었다.

 


명종이 (1555)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 비.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큰 고목이 100년 동안 벌레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지 이미 오래입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명종은 자신을 한 고아에 불과하고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구중궁궐의 한 과부라고 한 내용에 격분했다. 결국, 언로를 막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명종은 벌을 줄 수 없었다.

 


남명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먼저 반긴다.

 

목숨을 내건 진언에 고개가 절로 숙인다. 사직소를 읽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마음((神明)이 머무르는 집()을 그린 <신명사도(神明舍圖)>가 먼저 반긴다. 남명 선생이 마음의 안과 밖을 잘 다스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치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신명사도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성곽으로 드러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경()과 의()로 실천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남명 선생이 <경의>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일깨우기 위해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닌 경의검(敬義劍). 칼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안으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고, 바깥으로는 결단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라는 뜻이다.

 

신명사도 옆으로는 선생의 학맥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선생의 생애를 찬찬히 관람하면서도 걸음이 멈춘 곳이 있다. 선생께서 <경의>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일깨우기 위해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닌 성성자(惺惺子)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 부르는 한 자루의 단검이 있다. 걸을 때마다 방울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이다. ‘내명자경(內明者敬)’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진 경의검은 안으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고, 바깥으로는 결단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라는 뜻이다. 옮고 그름을 제대로 배워 실천하라는 선생의 뜻이 칼에 아로새겨져 있다.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을 가진 남명 조식 선생의 가묘, 여재실(如在室)

 

기념관을 나와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고 하늘의 진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뜻을 가진 여재실(如在室)로 향했다.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는 가묘다. 잠시 문 밖에서 고개 숙여 예를 올렸다. 여재실 앞에는 산수유 겨울눈들이 새 세상으로 나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신명사도(神明舍圖)>는 남명 선생이 마음의 안과 밖을 잘 다스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이치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신명사도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성곽으로 드러내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체를 경()과 의()로 실천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여재실을 나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산천재(山天齋)로 걸음을 옮겼다. 산천재는 명종 16(1561)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으로 산천(山天)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들어서는 입구에는 선생의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산천재에 들어서자 지리산의 넉넉한 풍경이 들어온다. 지리산을 좋아하고 사랑해 열두 번이나 찾았던 지리산을 닮은 선생이 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있다.

 


산천재는 명종 16(1561) 남명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으로 산천(山天)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마당 한가운데는 오랜 시간의 흔적을 나무 외과 수슬을 받은 흔적을 온몸에 드러내는 남명매()가 있다. 오른편 산천재 주련에는 덕산복거(德山卜居)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 은하수처럼 십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으리./’

 

시를 읽다가 천왕봉을 바라보았다. 눈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천왕봉은 말이 없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선생의 천석종(千石鐘)’ 시 한 편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 나지 않네/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남명 선생 묘소

 

창문을 열어라. 아침 해가 너무나 청명하구나하며 돌아가신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산천재를 나와 다시금 기념관으로 걸었다. 기념관 옆으로 선생의 묘소 가는 길로 천천히 걸었다. 5분 정도 걷자 선생의 묘가 나온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 징사(徵士)였던 선생은 나를 처사(處士)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내 평생 뜻이다. 처사라고 쓰지 않고 관직을 쓴다면 이것은 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병시중을 들던 제자에게 말했다.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뜻하는 처사로 불리길 원했던 선생의 바람과 달리 묘에는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고 적혀 있다. 선생의 바람처럼 처사조남명지묘라고 적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묘비 옆에는 우리말로 적은 국역비가 있다. 밑에는 대곡 성운이 지은 원래의 묘비를 포함해 세 개의 비석이 한국전쟁의 총탄 자국도 품은 채 한쪽에 있다. 그 아래에는 두 번째 부인 송씨 묘가 있다.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후학이 세운 덕천서원

 

선생 묘에 인사를 올린 뒤 10여 분 거리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향했다.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후학이 세운 덕천서원 앞 홍살문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햇살에 샤워중이다. 서원 출입구는 신()이 출입하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에 하나씩 문이 있는 삼문(三門)’이다.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온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에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덕천서원 경의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경의당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린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배롱나무가 민낯으로 반긴다. 배롱나무 뒤편으로 정면 5,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의 경의당이 보인다. 경의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경의당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린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정면 3,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인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온다. 숭덕사 지붕은 바다 해()가 새겨진 기와들이 햇살이 빛난다.

 


덕천서원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정면 3,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인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온다. 숭덕사 지붕은 바다 해()가 새겨진 기와들이 햇살이 빛난다.

 

북명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이다. 곤은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 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조식은 남명이란 호를 지었다. 당시 유학자들이 배척했던 장자지만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백성만을 위한 나라를 꿈꾼 자유로웠던 삶을 살았던 남명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사당 가운데에는 선생의 위패가 있고 오른쪽에 수제자인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을 나오는데 들어갈 때는 몰랐던 내 무릎 크기의 두 개의 돌이 보인다. 아주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양새다.

 


덕천서원 경의당 대청에 앉아 맑은 하늘 오가는 구름을 보았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경의당 대청에 앉아 맑은 하늘 오가는 구름을 보았다. 마음이 평안해진다. 서원을 나와 길 건너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에 올랐다. 정자 옆에는 거창 포연에서 목욕하며 지은 시 욕천(浴川)’이 새겨져 있다.

 

온몸에 쌓인 40년간의 허물/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렸네/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오장에 생긴다면/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덕천서원 길 건너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에서 바라본 덕천강

 

칼 찬 선비의 바람이 머물고 그 숨결 따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다.

 

참고도서 : <칼을 찬 선비 남명의 숨결>,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 한국의 사상가 남명 조식>, <남명 조식의 문인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