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법 조선 시대 덕계 오건 선생에게 배우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고 한다. 고대 페르시아 다리우스 황제는 세계 최초의 우편 시스템을 발명했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페르시아 대도시를 포장도로로 연결한 길 덕분에 터키에서 이란까지 1주일 만에 편지가 도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길이 ‘왕도(’The royal road')‘다. 이처럼 쉽고 빠른 길을 공부에서 찾는 이가 있었다. 이에 수학자 유클리드는 수학을 쉽게 배울 방법에 대해 “페르시아의 왕도 같은 빠른 길은 없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왕도는 없지만,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을 찾아 경남 산청군 산청읍 서계서원을 1월 27일 찾았다. 산청읍 입구인 쌀고개에서는 잘 보이지만 막상 서계서원으로 찾아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진주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국도 3호선 밑 굴다리를 지나야하기 때문이다.
왕도는 없지만,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을 찾아 경남 산청군 산청읍 서계서원을 1월 27일 찾았다. 산청읍 입구인 쌀고개에서는 잘 보이지만 막상 서계서원으로 찾아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진주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국도 3호선 밑 굴다리를 지나야하기 때문이다. 산청교육지원청에서 진주 방향으로 50m 정도 가면 KBS산청중계소와 아이사랑 어린이집 등의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1km 정도 들어가면 서원이 나온다.
서계서원 입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떡메산’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흙 언덕이 있다. 불과 홍살문에서 15m 거리에 이런 흙 언덕이 떡하니 버티는 까닭이 궁금하다.
쌩~쌩, 쉼 없이 바람을 가르며 나름의 목적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는 차 소리가 저만치 들린다. 국도 3호선이 아주 가깝다. 서계서원 입구에는 마을 사람들이 ‘떡메산’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흙 언덕이 있다. 불과 홍살문에서 15m 거리에 이런 흙 언덕이 떡하니 버티는 까닭이 궁금하다. 마을 사람은 원래 지나가는 길인데 경지 정리 등으로 길이 바뀌면서 그렇다고 하는데 언덕 위에 푸른 소나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홍살문에서 한참을 흙 언덕을 보다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입덕(入德)’ 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서계서원 편액이 걸린 강당이 나온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서계서원은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 선생을 모신 곳이다.
서계서원은 덕계(德溪) 오건(吳健)을 모신 곳이다. 남명(南冥) 조식 선생의 수제자다. 오건 선생은 서른 살에 남명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지극한 효자였던 선생이 열한 살 때 부친상을 시작으로 14세에 조모상, 16세에 조부상, 24세에 모친상, 25세에 계조모상을 당하였다. 스물 입곱 되던 해 복을 시묘살이에서 벗어났다. 서계서원 편액 아래 처마에 앉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랗다.
덕계 오건 선생은 열한 살 때 부친상을 시작으로 14세에 조모상, 16세에 조부상, 24세에 모친상, 25세에 계조모상을 당하였다. 스물 입곱 되던 해 복을 시묘살이에서 벗어났다. (사진은 선생을 모신 서계서원)
강당 뒤편 선생의 위패를 모신 창덕사로 올라갔다. 창덕사 옆에는 향나무와 배롱나무가 햇살에 샤워 중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선생을 떠올렸다. 선생은 “너는 글을 열심히 읽어 집안을 일으키고 나아가 나라에 쓰일 큰 인물이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중용>을 무려 1000번이나 상중에 읽었다고 전한다. 중용에 나오는 작은 주석까지 송두리째 외울 뿐 아니라 내용까지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읽고 또 읽어 뜻을 깨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는 선생의 공부법은 요즘의 학생들에게도 좋은 공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읽고 또 읽어 뜻을 깨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는 덕계 오건 선생은 <중용>을 무려 1000번이나 상중에 읽었다고 전한다. (사진은 덕계 선생을 모신 서계서원)
덕계선생은 1558년 (명종 13)에 과거에 급제했다. 선생은 선조 5년에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이조정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전랑천거법’에 따라 후임에 김효원을 천거했다. 그러나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외척 심의겸이 선례에 없는 반대에 나섰다. 이조전랑 천거로 불거져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선생은 정쟁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동재 옆 덕천재 마루에 앉아 실천하는 유학을 가르친 남명 조식선생과 덕계 선생의 각별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덕산에 자리 잡은 남명 조식 선생을 뵈러 덕계 오건이 찾아왔다가 작별을 고하고 돌아가는데, 작별을 못내 아쉬워하던 남명이 10리 밖까지 배웅했다. 스승의 전별주에 취한 오건은 말에서 떨어져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남명이 덕계에게 전별주를 대접했던 나무 아래를 송객정(送客亭)이라 부르고, 덕계가 말에서 떨어져 이마를 다친 곳을 면상촌(面傷村)이라 부르게 되었다.(<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중에서)‘
서계서원 근처에 있는 덕계 오건 선생의 묘.
덕천재 옆 담장 사이로 난 작은 문을 통해 신도비를 지나 산으로 20m 정도 올라갔다. 선생의 묘가 있다. 함양 오씨 산청 종중 합동 제단 왼편에 선생의 묘가 있다. 선생의 묘에 묵례한 뒤 읍내를 바라보았다.
덕계 오건 선생의 묘 근처 산길을 걸으며 ‘머리가 나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쉽게 내뺏은 나 자신을 반성했다. 올해 목표로 세운 공부, 읽고 또 읽어 깨칠 때까지 해보자 다짐했다.
묘를 나와 산길을 따라 서원 뒤편까지 천천히 걸었다. 가난과 10여 년의 상중(喪中)이라는 환경에 굴하지 않은 덕계 오건 선생의 공부하는 의지와 공부법에 용기를 얻었다. ‘머리가 나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쉽게 내뺏은 나 자신이 부끄럽다. 올해 목표로 세운 공부, 읽고 또 읽어 깨칠 때까지 해보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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