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416년 전 그날도 오늘(4월 6일)처럼 비가 내렸을까. 내가 찾은 길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다. 충무공 일행은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서울 의금부 옥문(지하철 종각역 인근)을 출발해 경남 진주까지 121일간 640.4㎞를 걸었다. 진주는 충무공 백의종군의 마지막이다. 이곳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을 받았다. 조선 수군은 칠전량 해전에서 전멸했지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리고 300여 척이 넘는 왜군의 수군을 물리친 명량대첩과 본국으로 도망가는 왜군을 끝까지 막고 싸워 승리를 이끌며 순국한 노량해전을 있게 한 출발점이다. 이달 28일 충무공 탄신기념일을 앞두고 그 길을 찾아 떠났다.
‘이사재’에서 바라본 경남 산청 단성면 남사예담촌.
경남 진주에서 출발해 40여 분을 내달려 도착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뽑힌 산청 <남사예담촌>이다. 남사리내력비 앞에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도보탐방로> 제1코스 고난의 길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마을의 아름다운 돌담길을 따라 마을을 휘감아 도는 하천을 지났다. ‘이사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사재’는 임꺽정의 난을 진압한 공을 세운 대사헌․호조참판을 지낸 박호원(1527~)의 재실이다. ‘이사재’ 아래에는 후손이 살고 있다. 후손이 사는 집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충무공 일행은 1597년(정유년) 6월 1일에 하동읍성을 출발해 산청군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노비가 농사짓는 허름한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 비록 당시 장군이 묵었던 집은 없지만 ‘이사재’ 마루에 걸터앉아 마을을 바라보았다. 충무공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떠올렸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로 시작하는 이조년의 <다정가>처럼 아름다운 남사예담촌, 예담길.
‘이사재’를 나왔다. 초록 잎을 틔우려는 새순에 봄비가 매달려 있었다. 왼편에 있는 천590m의 ‘예담길’을 걸었다. 몇 걸음 걸었을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로 시작하는 이조년의 봄밤 풍경을 노래한 <다정가>가 적힌 표지판이 나온다. 시를 천천히 읽으면서 ‘정이 많은 것도 병인 양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시인의 마음’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시인과 달리 충무공은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으로 시름하는 민중을 걱정하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듯하다.
남사예담촌의 숨겨진 비경 중 하나인 두꺼비 바위.
아름다운 풍경 너머로 전쟁으로 고통 받았을 조선 민중들의 넋을 봄비는 촉촉이 어루만지고 있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12년 동안 진주에서 틈만 나면 이곳을 찾는다는 중 늙은이가 비옷을 입고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봄비에 막걸리라도 한잔했는지 불콰해진 얼굴이다. 예담길을 묻자 뜻하지 않게 마을에서 자신만이 발견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사교 다리로 이끈 그는 다리 오른편의 우암이라 적힌 바위를 가리켰다. 바위 아래에는 개울을 뛰어넘을 듯한 자세의 두꺼비를 닮은 돌이 있다. 덕분에 좋은 예담촌의 숨겨진 비경 하나를 담았다.
남사예담촌 길 건너 삼거리에서 진주시 수곡면 방향으로 300m 정도 올라가면 맛있는 호떡집이 있다.
마을 앞 도로 건너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른 점심을 먹은 까닭에 이곳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남사별곡’의 국숫집을 지났다. 국숫집을 지나 진주시 수곡면 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폐교 밑에 있는 허름한 임시 건물이 나온다. 비닐 휘장을 들어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호떡집이다. 여든은 훌쩍 넘겼을 할머니가 하나 더 달라고 돈을 내밀어도 하나면 된다며 거절한다. 아침 9시 30분에 나와 반죽을 다 팔면 문을 닫는 호떡집이다. 이 호떡집은 일요일도 쉬고 할머니가 병원에 가는 목요일도 쉰다. 또 할머니 건강에 따라 예고 없이 문을 열지 않는다. 부슬비가 내리는 중인데도 진주에서 왔다는 아주머니 일행 5명이 호떡을 기다려 맛나게 먹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한 호떡 하나 받아 들고 차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후후 불며 먹었다. 속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뜨거웠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창촌삼거리에서 진주시 수곡면 방향으로 가는 길에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받은 ‘손경례 집’이 있다.
차를 돌려 다시 예담촌 삼거리에서 천왕봉 쪽으로 향했다. 400여 년 전, 충무공 일행은 점심나절을 하동군 옥종면 청수리 앞 개울가에서 쉬었다. 쉬고 난 뒤 덕천강을 끼고 난 길을 따라 산청군 단성면 창촌리 금만 마을에서 산길을 들러 단성면 길리 마을을 거쳐 현 단성면 남사마을에 이르렀다. 나는 그 길을 되돌아 승용차로 흔적을 추적하는 셈이다.
길리를 거쳐 이곳 사람들이 ‘칠정’이라고 부르는 창촌삼거리에 이르렀다. 길을 그대로 쭉 가면 지리산 천왕봉이 나오고 왼편으로 가면 하동군 옥종면이다. 삼거리 부근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저 멀리 지리산에 비를 머금은 구름이 걸렸다. 봄비에 덕천강 물살 빠르게 남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백의종군로 가는 길 3.9km라는 돌로 만든 이정표의 발자국이 정겹다. 생생 달리는 차들이 무서워 조심스럽지만 올 여름에는 충무공처럼 이 길을 걸어보고자 하는 결심을 했다. 삼거리 화단에는 선 분홍빛 꽃잔디가 아름답다.
충무공이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했다는 진주시 수곡면 ‘진배미’
칠정마을이 있는 왼편으로 내달렸다. 당산마을을 지났다. 하동군 옥종면으로 가는 길과 진주시 수곡면으로 가는 삼거리 앞에는 백의종군로 안내판이 큼직막 하다. 입 간판에는 제2코스 좌절의 길이라 적혀 있다. 금만 마을, 지리산고등학교를 지나자 진주시 수곡면 ‘손경례 집’에 이르렀다. 마을 입구 앞에는 수곡농협 농산물 집화장이 있다. 집화장 옆에는 거북선 위에 백의종군로 이정표가 새겨져 있다.
진배미 들판 한가운데에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유적지가 있다.
마을 회관 앞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나무는 역사의 흔적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세월의 무게에 나무는 혼자 서 있지 못하고 쇠파이프 지지대 3개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마을 회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새콤달콤한 새빨간 딸기로 유명한 이곳의 특산물이 비닐하우스에 가득하다. 비닐하우스가 촘촘히 들어선 들판이 ‘진배미’다. 충무공이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했을 만큼 넓은 들이다. ‘진배미’들을 경상남도는 도 기념물 제16호인 『이충무공진배미 유지』로 지정하고 『이충무공군사훈련유적비』유적지를 세웠다. 난중일기에는 “무오, 9월 10일(1597년 7월 29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다. 탄식할 일이다. 남해현령 박대남이 와서 봤다.”라고 적었다. 들 한가운데 있는 유적지는 비닐하우스에 둘러 있어 깜빡 지나쳐 농로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진주시 수곡면 ‘손경례 집’이 있는 마을 입구에는 거북선 위에 백의종군로 이정표가 새겨져 있다.
옥상을 내려와 천천히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노란 괴불주머니가 바람에 살랑인다. 마을 입구에서 50m쯤 올라가자 ‘손경례 집’이 나왔다. 현재의 ‘손경례 집’은 개량된 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있다.
난중일기에는 “7월 27일 이른 아침에 정성(鼎城) 건너편 손경례의 집으로 옮겨 유숙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면서 이곳 손경례 고택에 머문 것은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다.
8월 3일 이른 아침, 선전관이 왔다. 선전관은 선조가 보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왔다.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받은 진주시 수곡면 ‘손경례 집’이 있는 마을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왕은 이르노라. 오호라! 국가가 의지할 곳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려 흉악한 칼날이 다시 성하여 마침내 삼도의 군사를 한 번 싸움에서 모두 잃었으니 이후로 바다 가까운 고을은 누가 다시 막아 낼 것인가?
~
그대는 일찍 수사 책임을 맡았던 그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로 업적이 크게 떨쳐,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건만,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한 것은 역시 사람의 생각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노니, 경은 지금 나아가 군사를 모아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성을 일시에 떨치면 이미 흩어진 백성의 마음을 다시 편안케 할 수 있고, 적 또한 우리가 준비가 있음을 듣고 감히 다시 방자하게 창궐하지 못할 것이니, 경은 이를 힘쓸 지어다.
~
나라 건져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길 바라며, 이제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알지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임명 받은 진주시 수곡면 ‘손경례 집’
최강 조선 수군을 칠전량 해전에서 모두 잃어버린 선조와 조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임명한 것이다.
충무공은 1597년 2월 26일 임금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의 관직을 박탈당하고 의금부에 투옥된 지 한 달이 넘은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 백의종군로는 4월 1일부터 서울-경기-충남-전남-경남 진주에 이르러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전날인 1597년 8월 2일까지 걸었던 120일간 640.4㎞를 걸었던 충무공 백의종군의 마지막이다. 또한, 칠전량 해전에서 전멸한 조선 수군을 추슬러 12척의 배로 300여척이 넘는 왜군의 수군을 물리친 명랑대첩을 있게 하고 본국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끝까지 막고 싸워 승리를 이끌면서 순국한 노량해전의 시작점이다.
개량한옥 ‘손경례 집’ 사랑채 처마 아래에 빛바랜 이순신장군의 영정이 있다. 사랑채 앞에는 1965년에 건립된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기념비가 서 있다. 그 옆에는 ‘명량,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적힌 나무 표지판이 있다.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일생의 전환점이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7년을 승리로 이끈 역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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