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제96주년 삼일절을 맞아 여기저기 걸어놓은 태극기가 바람에 더욱 펄럭였다. 경남 진주시 남강에 자리한 진주성을 오후에 찾았다. 정문인 공북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조릿대가 바람에 사각사각 머리 흔든다. 조릿대 너머로 성벽 위로 붉은 깃발도 덩달아 흔들린다.
진주성 정문인 공북문을 비롯해 촉석문 천정에 황룡과 청룡이 그려져 있다.
공북문을 지나면서 고개 들어 천정을 보았다. 청룡과 황룡의 모습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은 머리는 사슴과 같은 뿔과 등에는 81개의 비늘이 있다. 몸통은 뱀과 같고 네 개의 발이 있고 발톱은 매를 닮았다.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발바닥은 호랑이, 배는 큰 조개 모습을 가졌다고 한다. 황룡은 임금이나 황제를 상징하고 청룡은 사악한 귀신을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진주성은 공북문과 촉석문 천정에 청룡과 황룡이 그려져 있다.
공북문을 지나자 높이 7m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이 내려다본다. 충무공 하면 이순신 장군만 떠올리는데 실제 500년 조선의 역사에서 충무공을 받은 이는 모두 9명이다. 이순신, 김시민 외에도 조영무(趙英茂), 이준(李浚), 남이(南怡), 이수일(李守一), 김응하(金應河), 정충신(鄭忠信), 구인후(具仁逅) 장군이다.
진주성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과 의암바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을 뒤로하고 성 너머 푸른 남강을 구경할 사이도 없이 바삐 촉석루로 곧장 걸었다. 3대째 조경을 하는 숲 해설가 박정기 선생의 <전통공간 속 나무와 왜색문화> 공개강의가 잠시 뒤에 있기 때문이다. 촉석루 앞에서 서성이는데 벌써 계사순의단에서 호국영령들께 참배한 박정기 선생과 일부 참석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모인 8명의 참여자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 촉석루 안으로 들어갔다. “촉석루 내 담장을 따라 큰 나무들로 조경한 것은 우리 전통 조경양식이 아니”라며 박정기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촉석루 주변에 작은 나무들을 테두리 잡기로 줄지어 심은 ‘파르테르’ 조경방식도 잘못이라고 했다. 우리 전통 공간은 자연스럽게 군식이나 산식형태로 심었다고 한다.
진주성 곳곳에는 작은 나무들을 테두리 잡기로 줄지어 심은 ‘파르테르’ 조경방식은 우리 전통 조경이 아니다. 우리 전통 공간은 자연스럽게 군식이나 산식형태로 심었다.
“촉석루 국보 지정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어려울 겁니다.”
진주시민들의 바람인 촉석루 국보 지정이 안 되는 까닭을 “남대문은 불에 타서 복원해 국보가 유지되었지만, 촉석루는 옛날 사진을 보면 지금처럼 지붕 선이 바짝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남쪽이라 눈이 많이 오지 않고 바람이 많이 불어 평평했다. 촉석루 기둥이 돌인데 세련되게 한다고 서울 경회루를 본떴습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문화재 복원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논개를 모신 의기사 가는 계단 옆 화계에는 ‘아까도’라는 왜철쭉이 심어져 있다.
진주성 내를 살림집이나 궁궐, 절 등의 집 뜰에서 층계 모양으로 단을 만들고 거기에 꽃을 심어 꽃의 계단처럼 만든 전통 방식의 ‘화계’ 설치는 잘했단다. 아쉽게도 그곳에 심은 나무가 ‘아까도’라는 왜철죽이다. 붉은 꽃은 일본 일장기를 상징하기도 해 황궁이나 신사 가면 온통 ‘아까도’라는 왜철죽을 심는다고 한다. 논개를 모신 의기사 가는 계단 옆 화계뿐 아니라 진주성 2차 전투 때 희생당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는 계사순의단 화계에도 왜철쭉이 심어져 있다. 의기사로 들어가자 오른편에 검은 대나무 ‘오죽’이 사당을 밖에서 가렸다. 촉석문에서 촉석루에 이르는 네모난 광장에는 느티나무가 있는데 다행히 한가운데를 약간 벗어난 형태다. 정원 한 가운데에 나무가 있으면 흉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높은 산에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한 것처럼 조선의 관아 마당 한가운데에 나무를 심어 기운을 끊으려고 했다고 한다.
동북아전쟁(임진왜란) 진주성 2차 전투 때 희생당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는계사순의단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나무와 왜철쭉이 화계에 심어져 있다.
촉석루를 나와 계사순의단을 지났다. 계사순의단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나무와 왜철쭉이 화계에 심어져 있다. 화계에는 큰 키 나무가 아니라 관목위주로 심는다. 저절로 자라도록 해야 한다. 부잣집 정원처럼 계속 다듬는 게 아니다. 양식은 맞는데 수종이 틀렸다며 아쉬워했다. 계사순의단 화계 끝에 중국단풍 나무가 서 있다. 중국단풍 나무뿐 아니라 성내에는 미국풍나무와 같이 나무 이름에 외국이름이 분명하게 들어가는 외래수종이 심어져 있었다. 옛 경남도청의 정문이었던 영남포정사 쪽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팽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다. 팽나무는 밑동 뿌리가 땅 위로 드러나는 판근(板根) 형태를 보였다. 판근일 때 나무는 오래오래 산단다. 오히려 나무를 보호한다며 드러난 판근에 흙으로 덮어씌우는 게 나무를 학대라고 한다.
국립진주박물관 야외공연장은 우리 전통 방식의 화계 형식을 빌려 계단으로 관람석을 만들었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꽝광나무로 심어져 있다.
팽나무를 지나자 노란 산수유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샛노란 빛을 더해갔다. 산수유 지나자 국립진주박물관으로 가는 길옆으로는 일제강점기에 들여온 일본 상징나무 히노끼(편백) 곧게 있다. 박물관 앞 야외공연장이 나왔다. 야외공연장은 우리 전통 방식의 화계 형식을 빌려 계단으로 관람석을 만들었다. 화계에는 동글동글한 나무가 많다. ‘꽝꽝나무’다. 전통공간에서는 일일이 손질하며 가꾸지 않고 수종도 일본에서 들어온 나무라고 한다. 조선이 임진왜란이라 불렀던 동북아국제전쟁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 주변에 왜색 수종이 눈에 거슬렸다.
국립진주박물관 건물 입구 앞에는 마치 소나무와 주목을 억압하듯 집채만 한 졸가시나무가 서 있다. 이 역시 일본에서 들여온 나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박물관 입구에는 마치 소나무와 주목을 억압하듯 집채만 한 졸가시나무가 서 있다. 이 역시 일본에서 들여온 나무다. 박물관에서 서장대로 향하는 야트막한 구릉에는 벚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다. 일본은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지 않는다. 언덕에 심는다. 우리처럼 줄 세워 심지 않는다. 비록 벚나무가 우리나라가 자생지이지만 이미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일본을 상징하고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벚나무다. 일본 나무다. 심어진 형식도 일본식이다. 북장대로 가는 성벽 옆으로도 벚나무가 일본식으로 심어져 있다.
진주성 내 야트막한 구릉에는 벚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일본은 우리처럼 줄 세워 벚나무를 심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언덕에 벚나무를 심는데 일본을 상징하고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벚나무다.
이 밖에도 진주성 내에는 국적 불명의 외국 조경 양식으로 심어진 나무들이 많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북문으로 향했다. 공북문 옆 성벽 쪽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버드나무가 외로이 서 있다. 예전에는 버드나무가 많았지만, 이제는 수종도 많이 바뀌어 버드나무는 진주성 내 보기 드물다.
예전에는 많이 심어졌던 버드나무가 이제는 드물게 진주성 공북문 옆에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외로이 서있다.
2시간가량의 <전통공간 속 나무와 왜색문화> 강의를 현장에서 들으면서 구국 성지 진주성에는 광복이 오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불과 10년 전에 친일 화가 이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의 엉터리 영정을 시민과 지자체가 협력해 떼어낸 적이 있다. 논개 표준영정을 현상 공모해 의기사에 새로이 걸었다. 7만 민관군과 논개 순절의 고귀한 정신이 깃든 진주성에 왜색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당시 진주 시민의 의지였다. 우리는 민족혼을 일깨운다며 진주성을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을 했고 앞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일본식 조경을 답습했다. 진주성 성역화 당시 심은 왜색 수종과 외래 수종이 성내에 퍼져 있다. 비록 진주성 성역화 당시 ‘외래 수종’을 이식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왜적에 맞서 싸운 7만 민관군과 논개의 애국충정이 깃든 호국성지인 진주성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 왜색수종과 외래 수종을 제거하고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산철쭉 등 한국 전통 수목을 심어야 한다.
광복 70주년인 올해도 진주성 내에 여전한 왜색 수종과 조경에 논개와 7만 군관민의 우는 소리가 400여 년이 흐른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에서는 일본식 연못을 허물고 우리나라 전통 연못을 만든다고 한다. 단순히 나무와 조경의 문제가 아니다. 호국성지라는 정체성에 어울리는 조경과 수종 선택으로 더욱 빛나는 성지로 거듭나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광복 70주년인 올해도 여전한 왜색 수종과 조경에 논개와 7만 군관민의 우는 소리가 400여 년이 흐른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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