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비짜루 사이에 끼여 살아남은 진주여고- 갑질에 막힌 체증, 뻥 뚫은 진주여고에서 만난 희망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5. 2.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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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민족교육을 비짜루로 싹싹 쓸어서 바다에 던져 넣으려 했으나 그 비짜루 사이에 끼여 한 학교가 남았으니 그 학교가 진주여고다.”

20081127일 진주여고에 박경리 선생 시비를 세울 때 강희근 당시 경상대학교 교수의 축사다. 올해 4월이면 개교 90주년을 맞는 진주여고는 일제강점기 때 교육이 조국의 빠른 길이라 여긴 진주지역 선각자들이 세운 학교다. 질곡의 세월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은 민족 교육의 전당. 다가오는 삼일절을 앞둔 24일 햇살 잘 드는 오후 찾았다.

 

 

 

올해 4월이면 개교 90주년을 맞는 진주여고는 일제강점기 때 교육이 조국의 빠른 길이라 여긴 진주지역 선각자들이 세운 학교다.

 

주자장에 차를 세우고 본관을 지나 동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학교 정문이다. 정문을 지나는 오른편으로 일신(一新) 탑이 반긴다. 탑 지나 오른편에 효주기념관이 나온다. 학생들의 생활관으로 이용하는 이곳은 학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아쉽게도 문이 잠겨 물러났다. 본관 1층 행정실을 찾았다. 열쇠를 찾으러 간 사이 현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 가득 큼지막하게 청마 유치환이 쓴 교가가 새겨져 있다. 오늘도 진리의 휘영청 푸르름 아래 / 비봉산 초목들이 피고 지고 겸양하듯 / 남가랑 고운물이 흘러흘러 한결같듯 / 그리하여 마침내 이내 몸이 / 큰 하나에 맺혔음을 배움으로 애오라지 / 먼 후일을 기약하는 저희들.”

 

 

효주기념관 내부 전경.

 

본관 로비를 가로질러 가면 일신갤러리가 적힌 팻말 아래 여러 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왔던 길을 돌아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왼편으로 진주여고 교복들이 시대별로 걸려 있다. 개교부터 현재까지 4번의 교복 변천을 살펴볼 수 있다. 더구나 진주여고의 상징과도 같은 파란색 보조 손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진주여고의 교복 변천사이면서 우리나라 여고 교복의 역사다. 기념관 정면에는 효주 허만정 선생과 선생의 부친 지신정 허준 선생의 사진과 함께 학교 건립에 관한 역사가 깃들여져 있다. 진주여고는 일제 강점기 교육이 조국 독립의 빠른 길이라 여긴 허만정 선생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성심을 모아 일신 재단을 구성 첫발을 내디뎠다. 선생은 LG그룹의 공동창업자로 현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할아버지이다. 지역유지들은 1920년 봄에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기성회를 조직하고 설립기금 50만 원을 목표로 당시 유력한 진주시민을 모두 참여시켜 4년 동안 모금했다. 19233월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양성할 가능성 있다고 남자고등학교(현 진주고등학교)설립 허가를 거부하자 할 수 없이 19254월에 여학교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주여고의 교복 변천사이면서 우리나라 여고 교복의 역사다.

 

여고생들의 빛바랜 추억이 전시된 사진 밑으로 소설 <토지>의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반갑게 만날 수 있다. 통영 출신인 박경리 선생은 통영초등학교를 나와 여기를 졸업했다. (1941-1945) 신라, 가야시대에서 시작해 일본강점기까지 기증 역사유물이 전시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학교 초기의 발자취가 사진으로 담겨 있다.

 

기념관을 나왔다. 들어갈 때는 지나쳤는데 계단에 봄까치꽃이 햇살에 보랏빛을 빛내고 있었다. ‘봄까치꽃이란 예쁜 꽃 이름보다 개불알풀꽃으로 더 알려진 이 꽃의 속명은 성인의 이름 베로니카(Veronica)에서 유래한단다. <한국식물생태보감>. 책에서는 허리를 숙여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무릎을 꿇어 꽃잎 속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눈물을 훔치던 성녀(聖女)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나타났다는 예수님의 환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고교 시절의 추억이 보랏빛 향기 속에 스쳐 지날 뿐이었다.

 

 

기념관과 본관 사이에는 개교 70주년을 기념한 일신상(一新像)이 서 있다.

 

기념관과 본관 사이에는 개교 70주년을 기념한 일신상(一新像)이 서 있다. 책과 횃불을 든 두 여인 사이로 한복을 입은 여인이 두 손으로 공손히 나뭇가지를 받쳐 하늘을 향하는 조각상이다. 일신상을 구경하다 교문에서 한길로 쭉 뻗은 충효로를 걸었다. 2009년에는 영화 <여고괴담 5>을 촬영한 곳이라는 데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아름답다. 기념관 뒤편에는 계단들이 반원을 그린 야외무대가 있다. 학교는 본관, 사랑관(1학년 동), 협동관(2학년 동), 면학관(3학년 동), 생활관(효주기념관), 봉산관(급식소), 일신관(체육관), 사택 이렇게 총 8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대학 캠퍼스보다 아름다운 진주여고 교정.

 

비봉산 정기 받은 우리 딸들아! 저마다의 꿈을 활짝 펼쳐라!’ 는 걸개가 걸린 건물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D-272’이라는 대학입시 초읽기가 한눈에 봐도 3학년이 생활하는 면학관임을 알게 한다. 공부에 지친 마음을 달랠 공간인 듯 건물 앞 나무 사이에는 긴 의자 두 개가 마주하고 있다. 면학관과 협동관 사이를 지나자 커다란 개잎갈나무가 떡하니 반긴다. 대부분의 침엽수가 상록수다. 그러나 잎갈나무는 침엽수지만 가을이면 물이 들고 잎이 떨어지는 낙엽수라 이름도 잎갈, 이깔나무다. 그런데 잎갈나무와 닮은 개잎갈나무는 낙엽지지 않는 상록수다. 가짜 잎갈나무인 셈이다. 개잎갈나무보다는 히말라야시다로 더 잘 알려진 이 나무는 땅에 닿을 듯 가지를 아래로 축축 늘어뜨린 아름다운 나무다. 세계 3대 정원수로 칠만큼 자태가 빼어난 이 나무가 학교의 역사만큼이나 크다. 나무 아래에 긴 의자 8개 빙 두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여고생이 이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즐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커다란 개잎갈나무 앞에는 박경리 선생의 시비가 서 있다.

 

학교의 상징 같은 개잎갈나무 앞에는 박경리 선생의 시비가 서 있다.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라는 선생의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시다. 선생은 과신하고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으니 죄 짓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가자고 후배들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체육관인 효주관 앞에는 효주 허만정 선생의 흉상이 있다.

 

시비를 지나면 오른편에 체육관인 효주관이 나온다. 효주관 앞에는 효주 허만정 선생의 흉상이 있다. 만석꾼의 아들이었지만 항일 감정이 강했던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인 백산상회에 독립자금을 댔다. 선생이 돈을 출연해 설립 진주여고는 사립학교였다가 해방 후 허 씨 후손들이 스스로 권리를 포기해 공립으로 전환했다. 당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백정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사 운동에도 돈을 댔다.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남해대교 밑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렬사를 중수할 때도 돈을 기부했다. 선생이 보여준 살아온 삶의 이력은 땅콩 회항사건과 같은 갑질의 횡포 속에 10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린 듯 시원하게 내려가게 했다.

 

 

교정 곳곳에는 긴 의자가 많아 휴식 취하기 좋다.

 

교문을 나서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너 세원 슈퍼 못 미쳐 작은 사거리 모티(모퉁이)의 주택을 찾아 나섰다. 점심을 이미 먹고 난 뒤였지만 진주여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추천하는 맛집의 국수를 먹어볼 참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 오후 3. 재료가 떨어졌다며 팔 수 없다는 수더분한 할머니의 말씀에 발길을 돌렸다. 간판 없는 맛집을뒤로 하고 나오는데 가게에 들어가는 아저씨. 잠시 후 그도 나처럼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 나왔다. 맛집은 오전 11시쯤에 문을 열어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데 보통 오후 3시 전후로 다 팔린다고 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의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의 <고향> 중에서)

효주 허만정 선생이 먼저 가고 선생이 세운 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이 걸어가면서 희망이라는 길을 만들었다. 오늘 나는 희망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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