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선녀 옷을 훔치던 나무꾼, 하늘이 되다- 경남 진주농민항쟁 유적지를 따라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5. 2. 14. 06:30
728x90

아침이슬보다 더 고운 진주에는 진주정신이 있다. 자신의 생식기마저 잘라야 했던 아버지가 있었던 수탈이 극심했던 조선 시대. 불의에 항거했던 나무꾼들이 있었다. 선녀 옷을 훔친 나무꾼이 아니라 하늘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의 열정을 따라 나섰다.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1달 전부터 근무일정을 바꿨다. 페이스북에서 만난 사람들이 진주 골목길을 어슬렁거린다는 안내에 설렜다. 더구나 이번 일정은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진주민란이라고 배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일정이었다 

 

경남 산청군 덕산 시장 앞에서 진주농민항쟁에 관해 진주시민단체 활동가 심인경 씨의 설명부터 먼저 들었다. 우리는 수첩을 꺼내거나 스마트폰에 말 하나하나를 옮겨 적으며 귀를 종끗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야외 수업 나온 아이 같았다.

 

드디어 27,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갔다. 덕산은 지리산에서 두 갈래로 나눠어 내려오던 물길이 하나로 만나 덕천강을 이루고 진주 남강을 향해 나가는 곳이다. 4일과 9일이 장이 서는 덕산 장날이 아니라 거리는 한산했다. 한산한 길가에는 지역특산품인 곶감이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 사이로 보란 듯이 늘어져 있다. 덕산 시장 앞에서 진주시민단체 활동가 심인경 씨의 설명부터 먼저 들었다. 우리는 수첩을 꺼내거나 스마트폰에 말 하나하나를 옮겨 적으며 귀를 종끗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야외 수업 나온 아이 같았다.

 

진주농민항쟁은 1862214일 초군(나무꾼)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덕산 장시에서 들고 일어났다. 진주 지역의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수탈에 저항하여 몰락한 양반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당시의 학정이 얼마나 심했던지 결국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아버지까지 생겨났다.

갈밭 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縣門)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한 일이나/ 예로부터 남절양은 들어 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서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애절양(哀絶陽)- 다산 정약용)

 

성난 농민들은 관아를 습격하고 조세 대장을 불태웠으며, 아전과 양반 지주의 집을 허물고 불살랐다. 진주농민항쟁은 곧 이웃 마을로 퍼져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퍼졌다. ‘임술농민봉기를 통해 농민의 사회의식은 더욱 성장했다. 2년 뒤 동학농민혁명으로 다시 불타오르기도 했다.

 

“1862년 진주농민항쟁의 관계자 중 누구도 이것을 예상하거나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현재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진주에서의 이 노력의 결과로 19세기 조선은 새로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옛 덕산장터보다 위쪽으로 자리를 옮긴 현재의 산청 덕산 시장. 셔터 내려진 가게들이 을씨년스럽다. 그런데도 한쪽에는 꾸득꾸득 말려져 가는 생선이 날 좀 보란 듯이 속을 다 드러내고 매달려 있다.

 

심 씨의 간략한 설명을 먼저 듣고 시장을 둘렀다. 원래의 덕산장터는 현재의 자리보다 좀 더 아래다. 남명기념관이 있는 곳이 옛 장터다. 셔터 내려진 가게들이 을씨년스럽다. 그런데도 한쪽에는 꾸득꾸득 말려져 가는 생선이 날 좀 보란 듯이 속을 다 드러내고 매달려 있다. 떡방앗간에는 안개 같은 하얀 김을 연신 내뿜으며 참깨가 볶아지고 있었다. 시장을 나와 옛 장터이자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로 향하는데 통나무집이 나왔다. 통나무집은 화원과 이용원이었다. 이용원 하얀 벽면에는 파이프를 문 명탐정 홈즈가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발소와 명탐정 홈즈라 생뚱맞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남정네가 들고 났을 이곳은 이발을 하며 얼마나 많은 이바구들이 흘러나왔을지 홈즈처럼 궁금했다.

 

곳곳에 감나무 그림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통영 동피랑 벽화가 뜬 이후로 여기저기 벽화가 한철이다. 가는 동안 눈 덮인 지리산을 배경으로 일행 중 한 명의 카메라에 기념사진도 찍혔다. 

 

산청 3매 중 하나로 불리는 남명매가 우리를 반겼다. 남명매는 아직 꽃을 틔우지 않았다. 나무에는 온통 새로운 시절을 보내기 위해 지난가을부터 온몸으로 만들어온 겨울눈으로 가득했다.

 

옛 덕산장터는 남명기념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기념관 맞은편에 있는 산천재로 들어갔다. 산천재는 조선 명종 때 실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당이다. 산천재 마당 한가운데는 산청 3매 중 하나로 불리는 남명매가 우리를 반겼다. 남명매는 아직 꽃을 틔우지 않았다. 나무에는 온통 새로운 시절을 보내기 위해 지난가을부터 온몸으로 만들어온 겨울눈으로 가득했다.

 

산천재를 나와 진주로 향했다. 백운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덕천강으로 하나 되는 삼거리에 있는 수청가(水淸街: 수청거리)에 잠시 차를 세웠다. 수청가 회의에서는 항쟁에 참여할 농민들을 규합하고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우리가 지나온 덕산 장터로 몰려가 철시를 벌렸다.

 

 

백운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덕천강으로 하나 되는 삼거리에 있는 수청가(水淸街: 수청거리)에 잠시 차를 세웠다. 수청가 회의에서는 항쟁에 참여할 농민들을 규합하고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수청가를 나와 진주시 수곡면으로 향했다. 수곡 들녘은 온통 비닐하우스 천지다. 비닐하우스에는 딸기가 한창이다. 일행 중 수곡출신이 안내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수곡 숯불갈비식당에 하는 1인당 7000원 하는 굴보쌈이 정갈하고 맛나게 나왔다. 특이하게 날달걀을 비벼 먹으라고 대접에 딸려 나왔다. 수곡막걸리도 몇 순배 마셨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 밥심을 느낀 식당이었다.

 

 

일행 중 수곡 출신이 안내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수곡 숯불갈비식당에 하는 1인당 7000원 하는 굴보쌈이 정갈하고 맛나게 나왔다. 특이하게 날달걀을 비벼 먹으라고 대접에 딸려 나왔다. 수곡막걸리도 몇 순배 마셨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 밥심을 느낀 식당이었다.

 

밥심 느낀 우리는 전국 기념유적지 어디를 가나 흔하게 만나는 일직선의 기념탑을 만났다. 기념탑에는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이라 적혀 있다. 기념탑은 우주로 향하는 로켓발사대처럼 푸른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었다. 탑 주위에는 항쟁으로 목이 잘린 유계춘을 비롯해 항쟁 주도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씩 새겨져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기념탑 한쪽에는 소설가 정동주가 쓴 하늘농부라는 기념비가 있다.

하늘 농부 정동주

농사는/ 하늘 뜻 섬기는 일/ 농부는/ 사람을 섬기는/ 하늘외다/ 하늘보고/ 침 뺃지 말라/ 사람이 곧/ 하늘이니/ 인내천(人乃天) 人乃天

 

   

경남 진주시 수곡면 진주농민항쟁기념탑. 탑 주위에는 항쟁으로 목이 잘린 유계춘을 비롯해 항쟁 주도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씩 새겨져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기념탑 맞은편이 수곡장터였다고 하는데 장터의 흔적을 지금은 찾을 수 없다. 2012년 건립한 기념탑 앞 공터에는 햇살 좋은 날 족구 경기를 하는 이들의 땀방울이 적셔져 있다. 우리가 지나온 덕산 장터에 앞서 26일 수곡 장터에서 최초 민회가 먼저 열렸다. 장터에 모인 농민들은 항쟁의 방향과 철시를 논의하고 결정했다고 한다. 무실장이라 불렸던 수곡장은 물길을 따라 물산이 들고 나는 곳이었다. 진주사람은 물론이고 인근 산청과 하동사람들도 모이기 쉬운 길목이었다.

    

 

진주농민항쟁의 주도자였던 유계춘 선생의 묘. 위쪽이 선생 모친 묘다.

 

기념탑을 등지고 나선 곳은 수곡면 원당리 유계춘 묘소다.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 기존 봉건제도의 바탕을 이뤘던 세금제도를 바꿈으로써 진주농민항쟁은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되었다. 진주농민항쟁은 부패한 조선 사회에 경종을 울렸지만, 주모자들은 역적이 됐다. 후손들은 역적의 후예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묘 앞에 서자 유계춘 선생이 나무꾼(초군, 농민)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노래가 떠오른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 망건 또 망건/ 짝 발이 휘양건/ 도르매 줌치 장독간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정동주가 쓴 소설 <백정> 중에서)

 

 

옛 진주 객사터.

 

진주농민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된 여행길은 묘소를 나와 진주 객사터였던 시내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 롯데인벤스 아파트 앞에서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귀가를 울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오늘날 진주농민항쟁의 정신을 어떤 형태로 계승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기회였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