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집필한 서포 김만중은 자신의 시에서 '문집에서 남해에서 지은 시는 빼버려야겠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진주에서 삼천포-창선대교를 타고 보물섬 남해의 목적지 남해유배문학관에 도착하자 소변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화장실을 둘러보니 구운몽호라는 배 한 척이 눈에 띈다. 배를 형상화한 이곳이 화장실이다. 푸른 바다의 고장, 보물섬에 잘 어울리는 이 배에 올라 시원하게 볼일을 보니 기분도 상쾌하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의 마음이 다르고 했는가. 볼일을 보고 나니 문학관에 들어가기 보다 근처의 풍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야외에는 십장생 야외조형물, 유배 초옥, 시비, 사씨남정기 패널 등과 함께 산책로가 있다. 십장생 야외조형물에 아이와 조카들이 먼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달란다.
산책로의 아름다운 조형물. 오히려 돌아갈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아름다운 유배지의 풍경에 더욱 그리움이 사무치는 것은 아닌지.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는 저 낚시꾼의 처지가 바로 나였구나. 정치적 갈등으로 고향산천에 그리운 가족들을 남겨두고 멀고 먼 남해로 유배지로 온 선비들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 속 응어리를 풀었는지 모른다.
소달구지에 실려 유배지로 떠나는 조형물이 마냥 신기한 아이들은 창살너머에 응어리 진 선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유배도 형벌의 하나다. 그래서 인지 형틀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서포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재현한 패널을 둘러보며 그의 문학을 천천히 되새김질한다.
문학관 입구에 반기는 이는 서포 김만중.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유배지는 남해의 노도(櫓島)였다. 서포는 유배기간 중 노도에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집필했다. 아마도 아름다운 유배지에서 홀로 떨어져 외로움을 달래며 문학 혼을 불태웠을거다.
思親詩 – 어머님을 그리면서
서포 김만중
오늘 아침 어머님이 그립다는 말 쓰려고 하니
글자도 되기도 전에 눈물은 이미 흥건하구나.
몇 번이나 붓끝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는지
문집에서 남해에서 지은 시는 반드시 빼버려야 하겠다.
남해선구줄끗기(경상남도 무형문화재 26호)
남해유배문학관은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문학관이다. 유배와 유배문학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습득을 위한 전문공간이다. 유배문학의 재조명하기 위해 37,469㎡의 부지에 건립한 건축면적 2,416㎡의 건물로 2010년 11월 개관했다. 유배 길에 올라 한 많은 삶을 살았지만,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킨 선조의 모습을 문학관 4개 전시실에서 살펴볼 수 있다.
목민심서를 비롯해 엄청난 저작을 남긴 정약용 선생도 ,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도 유배지에서 꽃핀 문학이다. 한이 스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 대신 붓을 들었기에 우리는 이분들의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저술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는다.
눈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안 언덕 위에 홀로 앉은 선비는 깊은 생각에 짐겨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가족을 그리워해야 했다. 한양에서 아득히 멀고도 먼 남해는 조선 유배지 중 한 곳이었다. 섬 곳곳의 돌 하나, 풀 한포기에도 그들 삶의 흔적이 서려 있다.
"자기나라 말을 버려두고 남의 나라 말로 시문을 짓는다는 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 서포 김만중의 <서포만필>중에서
남해유배문학관 http://yubae.namha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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