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아라비아 로렌스 + 닥터 지바고 = 독립운동가 서영해,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읽고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9. 4. 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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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가 누구야? 미국에 이승만, 유럽에 서영해라니.’

우연히 본 산지니에서 펴낸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서평단 모집 글에서 호기심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이런 까닭에 서평단에 지원했고 용케 뽑혀 책을 읽었다.




두툼하지 않은 책과 본문보다 더 재미있는 부록을 읽고 나자 떠오르는 이미지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로렌스와 지바고를 하나로 합친 모습이다.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영해는 17세에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이듬해에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막내로 활동하다가 192012월 프랑스로 단신 유학을 떠났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 한 편 같은 이야기를 품고 살아간다. 서영해는 대하 드라마 속 이야기를 정말 실제와 같이 살아왔다. 17살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나서고 부모 곁을 떠나 홀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과정 자체만도 한 편의 드라마다. 선생이 쓴 <해외에서 지낸 십오성상(十五星霜)을 돌아보며>는 말이 통하지 않는 속에서 다시금 중등교육과정을 밟아가는 과정과 파리의 대학생 풍경을 그린 이야기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읽어도 재미나고 흥미롭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의 유고 이후 재정 지원이 어려워 공부를 잠시 미루고 생업 전선에 뛰어든 과정에서도 독립운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과 달리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는 교민들이 거의 없어 동포 사회에서 재정적 후원은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임시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받은 기록도 없다.

 

오히려 임시정부 외무부 지시로 사무실을 얻어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한 선생은 프랑스 파리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알리고 한국을 소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는 어느 한국인의 삶의 주변이라는 장편 소설과 거울, 불행의 원인이라는 이름의 한국 전래민담, 구두장 수의 딸과 같은 단편소설을 쓰게 한 힘이 되었다.

 

더구나 1932년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으로 도산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유럽에서 석방 교섭에 나서기도 했다.

 

그를 비롯해 대부분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들이 단란한 가족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듯 서영해도 예외는 아니다. 단란한 가족생활은 아마도 프랑스 파리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유학온 엘리자와 결혼한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으로 임신한 아내와 생이별을 당하고 구금되었다 풀려났다. 3년 넘게 나치 독일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며 생사를 기로를 넘나들 때마다 아내와 아들을 만날 희망을 품었지만 해방된 프랑스에서 들려온 아내의 소식은 암담했다. 엘리자는 연락이 끊기자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한 뒤였다.

 

해방된 조국에도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몇 해 뒤에 돌아왔다. 십수 년을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그에게 해방된 조국은 전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의 혁명동지들아! 우리가 나라를 잃고 왜놈의 총칼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지가 벌써 30년이 되었다. ~ 혁명 경험이 적고 정치 훈련이 없던 만큼, 통일 덕으로 강적을 대할 줄 몰랐던 우리는 3.1운동 이후로 자상 어육의 당파싸움으로 원통한 실패를 얼마나 거듭하였더냐!~ 나라가 있고 난 뒤에야 주의와 당도 뜻이 있을 것이니 제발 당파싸움을 고치자!”

 

194081일 자 <신한민보>에 실린 고려통신사의 외치는 소리중에 나오는 말처럼 해방된 조국도 좌우로 갈라지고 이승만과 김구 등으로 나눠어졌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답게 남한 단독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을 중심으로 해방 정국은 움직였다. 서영해는 이승만이 19335개월간 제네바에 머무를 때 서영해는 그와 숙식을 함께하며 활동을 지원했다. 심지어 이승만이 오스트리아에서 거주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연애편지를 전달하기도 하고 나중에 결혼식 들러리를 서기까지 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의 독선과 아집을 앞에서 비판하기도 했던 과거의 미운털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더구나 이승만이 아닌 김구를 추종했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국내에 들어와 보니 내가 파리 일본대사관에서 박해를 당하여 쫓겨 다닐 때 나를 밀고하고 조선 민족을 부인하던 그러한 종류의 인물들이 공공연하게 나와 다니는 것과 정신을 잃은 허깨비의 정치 객들이 많은 것에는 눈에서 쌍심지가 날 지경이었다.”


서영해의 탄식처럼 자신을 밀고했던 친일부역자가 버젓이 활개 치고 다니는 모습과 허깨비와 같은 정치객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귀국한 뒤 결혼한 황순조와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갈 뜻을 폈지만 뜻하지 않게 중국에서 헤어졌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천명과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시오. 그래서 오늘 같은 안타까움도 웃어넘길 만큼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을 테지만 서영해는 그 후의 행적이 묘연하다. 황순조는 1952년 부산제일여자고등학교에 복직하며 교편생활을 계속하며 부산지역 여성 교육자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평생 서영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198563세로 생을 마감했다.

 

만약 한편의 가슴 뜨거운 영화 한 편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영화처럼 뜨겁고 가슴 찐하게 살다간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울컥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생의 기고문과 조소앙과 주고받은 편지 등에서 독립운동사의 한 장면 등을 엿볼 수 있다.


부산박물관에서 4월 11일부터 6월 9일까지 선생의 기획 전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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