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의 지질과 화석을 찾아 나선 문화기행
사흘 연속 밤 근무의 피로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셀 수조차 어려운 시간 너머 지구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여줄 테니 함께하자는데 마다할 수 없었다. 진주문화연구소에서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 -진주 지질과 화석>이라는 주제로 12일, 진주교육대학교 서승조 명예교수와 함께하는 문화기행을 열었다. 촉석루 아래에 있는 돌 벼랑과 의암, 망진산 절벽을 둘러보고, 백악기 화석 산지를 찾아본 뒤, 새와 공룡발자국이 있는 진성면 가진리를 거쳐, 고성군 공룡박물관과 해안절벽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진주문화연구소에서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 -진주 지질과 화석>이라는 주제로 12일, 진주교육대학교 서승조 명예교수와 함께하는 문화기행을 열었다.
밤 근무를 마치고 급히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었다. 직장을 나와 진주 시내로 향하면서 차 안에서 아침 대용으로 커피와 과자를 먹었다. 약속 시각보다 30여 분 일찍 도착했다. 차 안에서 알람을 맞춰놓고 단잠을 잤다. 알람 소리에 잠을 깨어 룸미러에 비친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12일, 경남 진주 촉석루 맞은편 중앙광장에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과 관광버스 한 차 가득 탈 사람들이 모였다. 서승조 진주교대 명예교수의 안내를 따라 광장 한쪽에서 오늘 문화기행의 주제인 ‘진주지질과 화석’에 관한 간단한 현장 강의를 들었다.
푸른 남강 건너편 진주성을 바라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 강물에 깎인 지층 단면을 볼 수 있는데 사암과 셰일로 된 지층의 총 두께는 100m가 넘는다. ‘진주층’이다.
푸른 남강 건너편 진주성을 바라보면 오랜 세월에 걸쳐 강물에 깎인 지층 단면을 볼 수 있다. 사암과 셰일로 된 지층의 총 두께는 100m가 넘는다. ‘진주층’이다. ‘진주층’이 드러난 곳이다. 『진주지질과 화석』의 저자인 서 명예교수는 ‘진주층’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1910년 일본 학자가 처음으로 제안했다. 조선 땅의 지질을 조사해서 각종 토목이나 건축 사업의 기초자료로 삼고 여러 가지 광물 자원을 발굴할 근거를 찾기 위해 한반도에서 말을 타고 다니면서 지질 조사를 했다.”고 했다. 지층의 이름을 지을 때는 반드시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지역의 지명을 따 표식으로 삼는단다. ‘뒤쪽에 있는 벼랑(낭떠러지)’이라는 뜻을 가진 ‘뒤벼리’는 진주 8경 중 하나다. 해 질 무렵이면 석양을 받아 절벽이 반짝반짝 빛난다. 뒤벼리가 진주층의 대표적인 곳이란다. 뒤벼리는 예전 호수 지역이었다가 지각변동으로 솟구친 것이라는데 그 시간의 무게를 가누기 어렵다.
진주층의 이야기보다 더 솔깃한 이야기를 한다. ‘의암은 정말 움직이는가?’ 의기 논개가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 의암 바위는 큰 몸통 바위에서 떨어져 나와 물에 잠겨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몸통 바위와 의암 사이에 있는 틈이 붙었다 떨어졌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적이 침입했을 때는 의암이 몸통바위 쪽으로 붙고 평화가 오면 떨어진다’는 의암에 얽힌 전설의 실체에 침이 꼴깍 넘어가는 듯했다. 의암이라는 바위는 진주성 쪽 바위와 전혀 성질이 다른 바위란다. 남강의 지류인 나불천에서 굴러와 박힌 바위로 몸통 바위와 의암은 애초 한 뿌리의 바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다.
한반도 지질도.
예전 진주층이 있던 지역들은 호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주성 쪽에는 물결무늬가 굳어진 바위들이 있단다. 다음에 진주성 강변으로 간다면 찬찬히 살펴볼 생각에 들떴다.
관광버스에 올라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유수리 공룡화석지로 이동했다. 천수교를 건너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망경동 남강 언저리 절벽을 보았다. 진주층이다. 단지 동에서 서쪽으로 절개되어 평평해 보일 뿐이다. 위치를 달리해 북쪽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 역시 뒤벼리처럼 동편으로 10도 정도 기운 진주층이다. 공간에 대해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지면 그 모습이 달리 보이는 착시가 느껴지는 셈이다.
진주 내동면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
희망교를 지나 하동 방향으로 가다 나동 공동묘지를 지났다. 가화천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 가화천은 남강댐을 만들면서 홍수 조절을 위해 사천 바다쪽으로 기존의 하천을 넓혀 물길을 넓힌 하천이다. 물길을 넓히기 위해 기존의 하천 주위를 폭파했다. 그런 까닭에 바위에 묻혀 있던 화석이 세상에 드러난 셈이다.
먼저 답사갔던 이들이 벌초해놓아 하천으로 내려가는 길이 수월했다. 길라잡이가 없었다면 이 길도 몰랐고 화석인지 돌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주 내동면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라고 적힌 안내표지판도 보았다. ‘유수리 백악기 화석산지’는 약 1억3천만~1억 2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때 이곳에 발달했던 충적평원과 이 평원을 굽이쳐 흐르던 하천, 평원 위에 만들어진 작은 호수 등에 자갈, 모래, 진흙 등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이루어졌다.
진주 내동면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 소풍 때 숨은 보물찾기하듯 화석이라는 보물을 찾는 열기가 뜨거웠다.
소풍 때 숨은 보물찾기하듯 화석이라는 보물을 찾는 열기가 뜨거웠다. 나무가 선 채로 나무화석이 된 돌멩이는 약간 타원형에 누런 나무의 흔적이 있다. 설명을 듣기에 나무화석으로 알지 그렇지 않다면 여느 돌멩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일대는 천연기념물이라 함부로 화석을 채집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비가 내렸다. 비에도 가화천 주변의 화석을 찾는 호기심 어린 눈들의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 처음 찾기가 어렵지 찾으면 주위에 널리 있는 화석에 놀랐다. 화석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화석발견지에서 그래도 보존해 만든 경남과학원 화석전시관.
근처 진주비빔밥의 명인이 운영하는 야영장에서 진주 지질과 화석에 관한 공부도 잠시 했다. 책 내용을 다시 보는 낯익음이 반가웠다. 아쉽게도 책 덮으면, 강의 듣고 돌아서면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렇지만 이곳의 돌멩이 하나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중하게 깨달았다.
문산에서 점심을 먹고 진성면 가진리 경남과학원 내에 있는 공룡화석을 봤다. 이곳은 화석 발견지에서 그대로 보존해 화석전시관이 된 곳이다. 오늘뿐 아니라 몇 년전 까지는 해마다 몇 번씩 아이들과 몇 번을 찾았다. 그때는 공룡만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땅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공룡의 발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화석을 남긴 공룡의 걸음이 떠오르는 즐거운 상상의 나들이였다.
날카로운 손톱과 세모 모양의 얼굴을 한 새의 조상이라 추정되는 시조새의 복원 조형물
공룡의 피부 화석도 눈에 들어온다. 공룡 화석 전시관을 둘러보고 지하 자연사 전시관으로 내려갔다. 계단 끝에서 위를 올려다보자 커다란 공룡이 하늘을 날고 지하부터 지상 3층까지 덩치가 큰 공룡이 전시되어 있다. 몇 번을 온 곳이지만 그냥저냥 지나왔던 재현 물이 이번에는 일행에서 떨어져 한참을 들여다보게 한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날카로운 손톱과 세모 모양의 얼굴을 한 새의 조상이라 추정되는 시조새의 복원 조형물이다. 조류와 파충류를 합친 모양새다. 얼굴은 뱀의 모습을 하고 날갯짓 위로 날카로운 손톱을 내민 파충류와 조류를 반반씩 섞은 형상이다. 오늘날 하늘을 날고 있는 새의 조상이 공룡이라는 증거인 셈이다.
예전 교과서에 배운 시조새 화석은 입체감 있게 살려낸 조형물은 한편으로 신기하고 무서웠다. 과학원을 나온 우리는 이젠 고성 공룡박물관으로 향했다.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더 신났다. 나 역시 아이들과 몇 번을 찾고 공룡 이름과 특징을 들먹이며 말꼬리 잇기처럼 공룡 이름 들기를 한 추억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공룡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룡 시대의 지층과 지질이 한 번 더 눈길을 끌었다.
경남과학원을 나와 고성 공룡박물관으로 향했다. 몽골에서 발견될 당시 프로토케라톱스의 알들과 함께 발견돼 ‘알도둑’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비랍토르가 먼저 반긴다. 나중에 오비랍토르의 알로 밝혀졌다. 최근에는 오비랍토르가 알을 품고 있는 화석이 발견되어 공룡이 새처럼 알을 품고 보호했다는 것을 알려지면서 알도둑이라는 오해는 풀렸다. 문득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도 혹시나 편견과 오해로 생긴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해안선 가까이에서 파도·조류·연안수 등의 침식작용으로 암석이 파고들어 가면서 굴처럼 숭숭 뚫려 있는데 마치 밥상 다리를 닮았다고 붙여진 ‘상족암(床足岩)’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그런데도 서승조 선생님의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알려주고 싶은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근처 울퉁불퉁하고 층진 바위가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상족암으로 내려갔다. ‘상족암(床足岩)’ 또는 ‘쌍발이’는 해안선 가까이에서 파도·조류·연안수 등의 침식작용으로 암석이 파고들어 가면서 굴처럼 숭숭 뚫려 있는데 마치 밥상 다리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상족암 근처 해안 갯바위에는 수백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상족암에서 바라보는 갯바위의 풍경이다. 억겁의 세월 동안 지각운동으로 선명하게 드러난 수백 개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다. 지름 30㎝ 내외의 크기로 일정한 간격과 형태를 띠고 있다. 공룡 발자국을 길동무 삼아 바위를 세월을 거슬러 공룡처럼 걸어가는 즐거운 상상이 함께했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서산대사의 시가 떠올랐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마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지질 시대에 생존한 동식물의 유해나 활동 흔적 등이 지층에 남아 있는 화석에서 지구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무수한 세월의 마주한 시간이다.
지질 시대에 생존한 동식물의 유해나 활동 흔적 등이 지층에 남아 있는 화석에서 지구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무수한 세월의 마주한 시간이다. 진주의 지질과 화석을 찾아 걷는 이 길은 지구의 역사를 넘나드는 여정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진주 깊숙이 인류 너머의 역사가 흠씬 배어 있다. 지구과학이라는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나면 기나긴 시간 속으로 성큼 다가선다. 헤아릴 수 없는 머나먼 시간 너머를 지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햇살 좋은 날이면 다시 한 번 오늘 걸었던 이 길을 곱씹으며 억만년의 시간으로 들어가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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