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게 ‘돈’이다. 최근 ‘땅콩 회항’ 사건처럼 돈의 힘으로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돈은 아예 돌아버렸다. 그럼에도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실천한 이들이 있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알게 하기 위해 세운 진주 김해김씨 비각을 찾아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한 이들을 기렸다.
경남 진주시 진주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공북문에서 천수교까지는 진주‘인사동 골동품 거리’다. 거리에는 ‘새즈믄거리’라는 이름표 붙인 상평통보를 형상화한 조각이 먼저 반겼다.
일요일(4일) 햇살 좋은 오후, 경남 진주시 진주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공북문에서 진주보건소 쪽으로 30m 걸어갔다. ‘인사동 거리’다. 거리에는 ‘새즈믄거리’라는 이름표 붙인 상평통보를 형상화한 조각이 먼저 반겼다. 상평통보는 ‘떳떳이 평등하게 널리 통용되는 보배’라는 뜻이다. 조선 숙종 때 만들어져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 엽전의 둥근 모양은 하늘을 본뜨고, 네모난 구멍은 땅을 본떴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엽전을 만들기 위해 수작업을 해야 했던 당시의 주조 기술이 어쩔 수 없이 가운데를 네모지게 했다. 둥근 외형을 만들기 위해 가운데를 뚫고 고정하기 위해 네모난 모양을 만들었다. 상평통보 네모난 구멍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봄이면 새롭게 하얀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한 목련이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조형물을 지나자 겨울 지나 봄이면 새롭게 하얀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한 목련이 담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작고 단단한 몸을 일구며 하나의 우주를 담고 있었다. 겨울 속에서 다가올 봄기운을 맞은 느낌이었다. 서울의 인사동 거리처럼 진주의 인사동거리도 각종 골동품들을 엿볼 수 있다. 두꺼비 한 쌍이 줄을 맞춘 듯 잎을 꽉 다물고 앉아 있다.
두꺼비 돌다리를 보면서 문득 진주성 내에 있는 용다리 전설이 떠올랐다.
두꺼비 한 쌍을 지나자 두꺼비 돌다리가 나왔다. 문득 진주성 내에 있는 용다리 전설이 떠올랐다. 진주성 공북문을 지나 북장대에 못 미쳐 있는 돌무더기가 돌무더기가 용다리다. 양반집 따님을 사모하다 숨진 머슴의 슬픈 전설이 깃든 다리다.
(‘오드리 헵번은 왜 고개를 돌리지 않았을까?’ 참조 http://blog.daum.net/haechansol71/531)
젖가슴을 드러내고 활짝 웃는 달마대사 상은 보는 동안 기분이 절로 유쾌하게 만들었다.
제주도의 상징 돌하르방이 여기서도 이가 보일 듯 말듯 웃으며 반겨준다. 돌하르방 뒤에는 배꼽은 물론이고 젖가슴을 드러내고 활짝 웃는 달마대사 상은 보는 동안 기분이 절로 유쾌하게 만들었다. ‘양귀비보다 더 붉은 그 마을 흘러라’는 주막집이 나왔다. 처마에 앉아 술 한상 받아 마시고 싶었다. 아직 영업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잠시 앉아 다리 품을 쉬었다.
‘양귀비보다 더 붉은 그 마을 흘러라’는 주막집이 나왔다. 처마에 앉아 술 한상 받아 마시고 싶었다.
진주보건소 이전을 앞두었던 자리는 무료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었다. 여든두 살의 할머니가 맷돌을 의자 삼아 햇살을 안고 앉아계셨다. 남해에서 아들 공부시키려고 이곳 진주까지 오셨다는 할머니는 여기를 터전으로 삼아 영감님과 둘이서 살고 계신단다. 할머니의 희망이고 자랑이셨던 공부 잘한 아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른바 명문대학을 나와 유학도 다녀온 뒤 대기업에서 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할머니 가슴에 묻고 먼저 갔다고 했다. 할머니께 위로의 말씀을 건넬 필요가 없었다. 할머니는 아주 담담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우리 사는 게 그렇지 하는 달관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셨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인 ‘김해김씨 비각’이다. 비각이 있는 이곳은 진주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하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빗집 거리’라고 불렸다. 거리의 유래가 바로 이 비각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다시 일어나 길을 건넜다. ‘진주 에나길’이라는 표지판 뒤로 단청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비각이 나왔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인 ‘김해김씨 비각’이다. 비각이 있는 이곳은 진주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하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빗집 거리’라고 불렸다. 거리의 유래가 바로 이 비각이다. 비각에는 고종 때에 대제학을 지낸 김상현(1811~1890)의 정부인 연안 차씨와 그의 아들 김정식의 은혜를 추모하여 세운 송덕비의 일종인 시혜불망비 2기가 가지런히 서 있다. 이 비는 당시 진주성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질병 등의 재난을 당했을 때 위 두 사람이 재산을 털어 지극한 정성으로 사람들을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지역민들이 1901년과 1907년에 세웠다고 한다. 이 비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작은 비각이지만 처마를 이중으로 하고 처마를 길게 뻗치도록 하고 네 모서리에 8각의 굽은 기둥을 설치했다. 비석보다 화려한 비각으로 한말(韓末)의 비각 양식을 알 수 있는 건물이다.
‘김해김씨 비각’뒤로 진주성으로 붉게 타오르던 해가 걸렸다. 7만 민관군의 혼이 서려 있는 진주성 안에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을 등진 친일파 7기 비석도 함께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김해김씨 비각을 보면서 동학농민혁명의 불을 댕긴 원흉 조병갑의 송덕비가 떠올랐다. 1892년 1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탐관오리답게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구실로 천 냥을 강제로 징수하기도 했다. 오히려 아비를 욕되게 한 송덕비다. 이런 욕된 송덕비가 진주 성내에도 있다. 진주 성내 영남 포정사 뒤편에는 38기의 ‘진주성 비석군’이 있다. 조선 선조 3년(1604년)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영병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해 진주성과 시내 각처에 있던 비석들을 1973년 이곳으로 모은 것이다. 이곳에는 7만 민관군의 혼이 서려 있는 진주성 안에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을 등진 친일파 7기 비석도 함께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거짓 송덕비가 한둘이 아니다. 에나(진짜) 송덕비를 통해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알면 좋다. 널리 알려서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각에서 서장대 쪽으로 가는 서문 앞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와 함께 플라타너스가 한 그루가 서 있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남천의 붉은 열매는 추위를 이겨내는 전기 히터처럼 따스한 빛깔이다. 하지만 전기 히터만으로는 결코 겨울을 이겨내지 못한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나눔의 흔적에서 ‘상생(相生)’을 배웠다.
김현승 시인의 <플라타너스>의 일부처럼 플라타너스가 파란 하늘에 한껏 뽐을 내고 있다. 낙엽 진 겨울날 탁구공보다 약간 작은 열매들이 방울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다시 공북문 쪽으로 돌아 걸었다. 햇살을 등진 걸음은 빨랐다. 진주보건소에 이르자 굵은 콩알만 한 열매가 더욱 붉게 매달린 남천이 눈에 들어왔다.
남천의 붉은 열매는 추위를 이겨내는 전기 히터처럼 따스한 빛깔이다. 하지만 전기 히터만으로는 결코 겨울을 이겨내지 못한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나눔의 흔적에서 ‘상생(相生)’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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