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갤러리로 변신한 기차터널에서 무더운 여름의 열기를 잠시 잊다
하늘이 파랗다 못해 시원했다. 8월 22일 이날은 밤 근무가 있었다. 덕분에 아내를 출근시키기 위해 주차장으로 나서며 만난 햇살은 무척 반가웠다. 더구나 며칠 동안 지루한 늦장마로 눅눅한 마음탓에 더 좋았다. 사는 아파트 베란다 여기저기에 벌써 이불 등을 널어 놓은 이웃들이 보였다. 아내를 출근시키고 집에 돌아와 나 역시 베란다에 아이들이 내내 배를 붙이고 사는 이불을 널었다. 햇살에 샤워하는 이불과 이불을 뒤척이게 하는 바람은 내 마음을 뽀송뽀송하게 만든다.
휴대전화가 드르륵하고 울린다. 반가운 문자메시지다. 연차의 절반인 ‘반차’를 얻은 아내를 직장에서 태워 집으로 왔다. 우리 부부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선글라스를 낀 내 옆에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이 앉았다. 우리 부부의 데이트는 이제 시작이다. 차는 경남 진주 시내를 벗어나 내동면. 내동면에서 다시 하동을 향했다. 완사역에서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 차를 세웠다. 사천시 곤명면 ‘와인갤러리’. 지난 15일부터 31일까지 이곳에서 <2014 사천 다래와인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데이트 장소로 이미 점찍은 곳이다.
50여 년 전 진양호 수위 상승에 따라 버려진 기차 터널을 와인갤러리로 개조한 경남 사천 곤명면 <와인갤러리>에서 입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상한 문으로 들어가듯 우리 부부도 통나무로 막혀 있는 동굴의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한여름 30도의 무더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바로 맞은 듯 시원하다 못해 쌀랑했다. 동굴은 서늘한 17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50여 년 전 진양호 수위 상승에 따라 버려진 기차 터널을 와인갤러리로 개조한 곳이다. 사천의 특산물인 다래와인을 저장하는 곳이면서 문화공간으로 거듭나 여름 피서지뿐 아니라 색다른 경험을 찾는 이들의 나들이 장소다.
다래와인 축제를 맞아 독일 국립바이마르 극단에서 활동 중인 테너 이종궐 씨와 바리톤 김종근 씨 등이 출연하는 해설이 있는 성악 공연과 국악 공연, 문명숙 화가 초대전, 박은상 조각가 등 4명의 작품 전시가 있었다. 공연은 아쉽게도 이미 일정이 맞지 못해 관람하지 못했지만, 작품 전시를 구경하는 재미는 색달랐다. 터널 안에서 은은한 조명을 받는 그림 한 점, 한 점은 여느 갤러리에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시원했다.
아내의 손을 맞잡고 들어가기 무섭게 아내는 걸음을 멈췄다. 와인갤러리 사진 3장 이상 찍어서 인터넷 ‘카스’나 ‘밴드’에 등록하면 참다래와인 주박으로 만든 수제 다래와인 비누를 주는 이벤트에 꽂혔다. 와인 갤러리 안에 들어오면서 스마트 폰으로 찍던 아내는 간만에 카카오스토리에 미션 수행에 잠시 바빴다.
터널 안 시멘트 벽에는 인공 조명등을 태양처럼 의지해 초록빛을 띄운 이끼들이 빛난다. 초록이 꿈틀대는 생명의 힘찬 함성이 여느 유명 작품보다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터널 안 조명등이 물결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속으로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연인이 지나가고 아이 손을 잡은 젊은 엄마와 아빠도 안으로 걸어갔다.
우리 부부도 미션 수행을 마치고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널 안 시멘트 벽에는 인공 조명등을 태양처럼 의지해 초록빛을 띄운 이끼들이 빛난다. 초록이 꿈틀대는 생명의 힘찬 함성이 여느 유명 작품보다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초록의 함성 뒤로 피에트라산타 국립미술학교 비니치오 로바이 교장이 ‘대리석의 기적’이라며 추천한 박은상 작가의 조각품이 보인다. 로바이 교장은 ‘박은상의 조각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떠오른 파스콰 섬의 아련하고 장엄한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신비로움을 드러내듯이 대기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고 소개 글에 적혀 있다.
230m의 터널 끝자락까지 다래 와인 3만 병이 상자째로 물결치듯 함께했다.
조각 작품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문득 나와 함께 걷은 길동무가 아내 말고도 있었다. 230m의 터널 끝자락까지 다래 와인 3만 병이 상자째로 물결치듯 함께했다. 와인병이 물고기인 양 노니는 풍경에 잠시 입맛을 돋웠다. 입맛만 다신 김에 이번에는 터널 입구 근처에 있는 와인바에서 다래 와인을 무료 시식했다. 아내는 달짝지근하다고 했다. 3번에 나눠 마셔보란 말대로 작은 소주잔의 와인을 마셨다. 다래 향이 입으로 연결된 코로 들어온다. 떨떠름한 맛인가 싶었더니 웬걸 오히려 다래 주스처럼 달달한 맛이 잇따라 온다. 마지막으로 털어 넣자 알싸한 알코올이 묻어난다. 한 병을 주문했다. 자동차 운전을 위해 시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대신 집에서 이 느낌을 이어가기 위해 한 병을 주문했다.
조명등 아래 붉게 타오는 동그라미 그림이 보인다. 문명숙 화가의 <낯선타임>이라는 작품이다. 내게는 대보름달 속에서 두 연인이 늦은 시간 헤어지는 게 아쉬워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간간이 떨어지는 물을 막은 터널 안 파라솔 아래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았다. 조명등 아래 붉게 타오는 동그라미 그림이 보인다. 문명숙 화가의 <낯선타임>이라는 작품이다. 내게는 대보름달 속에서 두 연인이 늦은 시간 헤어지는 게 아쉬워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마치 지금의 아내와 데이트를 할 때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서기가 무척이나 아쉬웠던 내 마음을 엿보는 느낌이다.
슬며시 아내를 바라보았다. 불과 십수 년 전에는 곁에 있어도 보고 싶었던 당신. 아내의 손을 잡으려고 왼쪽으로 슬며시 의자를 붙이고 손을 더듬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는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대화 중이라 내밀려던 손 거두었다. 비록 서로의 체온을 나누지 못했지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두근두근 거렸다.
하루하루 앞만 보고 살기에도 버거운 늘 바쁜 우리. 우리에게 와인 축제는 주제 <휴식>처럼 숨찬 날숨을 내뱉고 냉방병 걱정 없는 시원한 바람을 가슴으로 들이마셨다.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잠시 멈춘 이곳은 숨 가쁜 현대인들의 시원한 그루터기다.
2012년 OECD 국가 임금 노동자 연평균 근로시간은 1,769시간인데 한국인 평균 노동시간은 2,163시간으로 멕시코 2,266시간에 이어 2위란다. 하루하루 앞만 보고 살기에도 버거운 늘 바쁜 우리. 우리에게 와인 축제는 주제 <휴식>처럼 숨찬 날숨을 내뱉고 냉방병 걱정 없는 시원한 바람을 가슴으로 들이마셨다. 무더운 여름의 열기가 잠시 멈춘 이곳은 숨 가쁜 현대인들의 시원한 그루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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