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교육도시 진주를 가다2-진주 최초 사립학교, 봉양학교(봉래초교)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5. 4. 1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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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도시 진주를 가다2-진주 최초 사립학교, 봉양학교(봉래초교)

 

진주를 일컬어 흔히들 <교육 도시>라고 한다. 시민 절반 가까이가 학생이라고도 한다. 2025년 올해에만 해도 진주 지역 학교 중에서 사봉초, 집현초, 진주여중, 진주중학교, 진주고, 진주여고 등 6개 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100년이라는 시간도 적지 않지만, 진주에는 무려 1000년이 넘는 교육기관도 있다. 진주향교다. 정확한 설립 연대를 알 수 없지만 기록에 고려 성종 6(987)에 향학당으로 처음 세워진 후 조선시대 들어 지금의 향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그 오랜 역사는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구나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은 경상국립대학교를 비롯한 진주교육대학교, 연암공과대학교, 진주보건대학교 4곳이나 있다. 단순히 역사가 오래고 교육기관이 많아서만 교육 도시라고 할 수는 없다. 뿌리 깊은 배움의 열정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배움의 열정을 따라가다 보면 교육 도시 진주라는 명성에 걸맞은 교육 도시 진주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진주향교와 진주고등학교 사이에 야트막한 언덕에 진주봉래초등학교가 있다. 여느 초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 학교는 진주에서 서양 선교사가 아닌 지역민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사립학교인 봉양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105월에 개교한 봉양학교는 근대 인권운동의 출발점인 형평운동을 이끈 강상호의 부친이자 당시 대안면장을 지낸 강재순을 비롯한 김기수 등 지역의 뜻있는 이들이 함께 설립을 주도했다. 봉양학교는 대안면의 공유재산으로 운영하면서 강재순의 장남인 강상호는 초대 교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1914년 대안면이 진주면으로 통합되면서 독자적인 운영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났다. 19193·1 만세운동이다. 진주에서 3·1만 세 운동으로 징역형을 받은 애국지사 23명 중 7명이 봉양학교 출신이다.

 

근대 교육뿐 아니라 민족교육에도 충실했던 봉양학교가 일제의 눈엣가시였음은 어쩌면 당연했다. 일본 제국주의 압박으로, 설립 9년 만에 일제가 관리하는 진주 제2 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

1925219일 자 조선일보에 봉양학교 관련 기사가 있다. 약차하면 봉양교학재산(鳳陽校學財產)을 달라기로 학부형회의 결의 진주제이보여교문제(晉州第二普女校問題)

 

경남진주(진주(晋州))뎨이공립보통학교(제이공립보통학교(第二公立普通學校))에서는 수년간 숙뎨되여오는 녀학교 (여학교(女學校)) 신축에 대하야 당국에서 칠천원의 건축비(건축비(建築費)) 중 약반액만 학부형이 부담하면 어김업시 설립하여 주겟다함으로 동회유지제씨는 극력활동하야 거이 성공의 희망이 잇게되자 재차 교셥을 개시하엿더니 아즉 철저한 해결을 보지 못하엿슴으로 지난 십일일 오후 한 시에 동교당내에서 정식간부회를 열고 좌긔사항을 걸의한 후 교셥위원을 선거하야 정식교셥을 하여본 뒤에 만일 실패되면 그전 강제로 빼앗긴 사림봉양학교(봉양학교(鳳陽學校)) 재산을 반환하야 달나는 동맹회(동맹회(同盟會))를 조직하기로하고 동오시에 폐회하엿다더라(진주)

 

결의사항(決議事項)

(),여학교신축(女學校新築)의건()

(),교사증축(校舍增築)의건()

(),학교림식임청부(學校林植林請負)의건()

(),수도가설(水道架設)의건()

(),학생모집(學生募集)의건()

 

여교교섭위원(女校交涉委員)=서윤보(徐允甫)김기수(金琪洙) 엄주태(嚴柱泰) 강주한(姜周漢)강기석(姜幾錫)장정식(張廷植)’

진주가 오늘날 교육의 도시라고 불린 배경 중에는 이처럼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도 지역민들이 자발적으로 사립학교를 세워 미래세대를 교육하려는 정신이 스며들어 오늘에도 이어져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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