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진주 시민들도 제대로 모르는 진주성의 촉석루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3. 11.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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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시민들도 제대로 모르는 진주성의 촉석루

 

 

 

진주 속 진주처럼 빛나는 곳이 진주성입니다. 감싸고 흐르는 남강이 어우러져 진주성과 촉석루는 어디에서 봐도 넉넉한 풍광을 안겨줍니다.

 

 

도심에 있어 쉽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진주 시민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이 즐겨 찾습니다. 그렇지만 진주 시민들도 잘 모르고 지나치는 명소가 진주성 촉석루입니다.

 

 

진주성 정문이 공북문을 지나 촉석루로 갈 수 있고 동문이 촉석문을 통하면 곧장 촉석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촉석루 앞에 이르면 먼저 장수 수()라 새겨진 커다란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우리를 반깁니다.

 

 

촉석루 담장으로 옛 진주성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옛 사진을 통해 현재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먼저 호정 하륜이 쓴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남강 강가에 뾰족뾰족한 돌들이 솟아 있는 모습에서 누각의 이름을 촉석루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별명처럼 달리는 불리는 이름은 진주성의 남쪽 지휘소라 해서 남장대라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도 해서 장원루라고도 합니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목사 김지대가 세웠습니다. 고려 때 왜구 침입으로 불타 몇 차례의 중건과 보수 등을 거쳤습니다. 국보 제276호였던 촉석루도 한국전쟁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1972년 시민들이 힘을 모아 다시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면 5, 측면 4칸의 다락집으로 팔작지붕 목조 기와입니다. 현 촉석루와 달리 옛적에는 경사진 곳에 있어 지금처럼 2중의 계단을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당시까지만 해도 동쪽에 누각 능허당과 청심헌, 서각(西閣)으로는 능허당과 임경헌이 있는 ‘224채의 부속건물을 날개처럼 거느렸습니다.

 

 

촉석루를 본떠 만든 밀양 영남루가 층층각으로 연결된 침류당(서각)과 능파당을 날개 누각(翼樓)으로 가진 것과 같습니다.

 

 

누각의 돌기둥은 경남 창원에 있는 촉석산에서 채석한 것이라 하는데 촉석산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들보는 강원도 오대산에 벌채했는데 당시 국군 공병대의 도움을 받아 벌채하고 옮겼다고 합니다.

 

 

북쪽에 붙은 촉석루 현판은 조선 영조 때 명필로 알려진 송하 조윤형의 글씨입니다.

 

 

남쪽 현판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쓴 것이었으나 민주당 정권 이후 그 판을 깎아 유당 정현복의 글씨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누각에 오르면 남쪽에 남장대라 쓴 글씨는 은초 정명수의 글씨입니다.

 

영남제일승은 청남 오제봉의 글씨입니다.

 

 

선조들이 촉석루를 읊은 시가 900여 수가 넘고 쓴 이도 650여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현재 촉석루에는 면재 정을보, 교은 정이오, 우당 박융, 경재 하연, 학봉 김성일, 만송 강렴, 농포 정문부, 조은 한몽삼, 한사 강대수, 태계 하진, 청천 신유한 등의 시가 걸려 있습니다.

 

 

먼저 벽에 걸린 주련(柱聯)은 청천 신유한의 시입니다.

晉陽城外水東流(진양성외수동류)진양성 너머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叢竹芳蘭錄映州(총죽방난녹영주)대숲과 난초는 물가에 푸르게 어렸다

天地報君三壯士(천지보군삼장사)천지에는 임금에게 보답한 삼장사요.

江山留客一高樓(강산유객일고루)강산에는 길손 붙잡는 높은 누각일세.

歌屛日照潛蛟舞(가병일조잠교무)가병에 해 비치자 숨었던 교룡이 춤추고

劍幕霜侵宿鷺愁(검막상침숙노수)병영 막사에 서리 치니 자던 백로 근심하네.

南望斗邊無戰氣(남망두변무전기)남쪽 바라보니 두성에 전쟁 기운 없는지라.

將壇茄鼓半春遊(장단가고반춘유)장단에서 풍악 울리며 봄날마냥 노니는구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걸린 현판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고려 때 면재 정을보가 쓴 시입니다.

 

黃鶴名樓彼一時 (황학명루피일시)황학이라 이름난 누()

崔公好事爲留詩 (최공호사위유시)저 한 때의 일인데 최공의 수다 덕에 시에 남게 되었지.

登臨景物無增損 (등림경물증손)올라 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題詠風流有盛衰 (제영풍류유성쇠)제영의 풍류는 성쇠가 보이누나.

牛壟魚磯秋草沒 (우롱어기추초전)고기 낚고 소 매던 곳

鶖梁鷺渚夕陽遲 (추량로저석양지)가을 풀은 시들고 백로 수리 노던 물가 석양은 더디 지네.

靑山四面皆新畵 (청산사면개신화)사방의 푸른 산은 갓 그려낸 그림이요

紅粉三行唱古詞 (홍부삼행창고사)세 줄로 선 기생들 옛 노래를 부르네.

玉斝高飛山月上 (옥가고비산월상)옥 술잔 높이 드니 산에 달은 올라오고

珠簾半捲嶺雲垂 (주렴반권영운수)주렴을 반 걷으니 재엔 구름 드리웠네.

倚欄回首乾坤小 (의란회수건곤소)난간 잡고 둘러보매 천지도 작아 뵈니

方信吾鄕特地奇 (방신오향특지기)우리 고을 특출 난 줄 이제 믿게 되누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면재 정을보 시를 제외하고는 조선 시대의 시들입니다.

 

 

여러 시들 중에서 농포 정문부는 동아시아전쟁 때 북관대첩으로 함경도 지역을 침략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맞서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 북관대첩(北關大捷)’ 이끈 장수입니다. 현재 이반성면에 가호서원에서 공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龍歲兵焚捲八區(용세병분권팔구) 임진년 전화(戰火)가 팔도를 휩쓸 적에

魚殃最慘此城樓(어앙최참차성루) 무고한 재앙 이 성루에 가장 처참하였어라.

石非可轉仍成矗(석비가전잉성촉) 굴릴 수도 없는 돌 이내 촉석 이루었고

江亦何心自在流(강역하심자재류) 강은 또한 무슨 맘에 절로 절로 흐르는가.

起廢神將人共力(기폐신장인공력) 폐허를 일으킴에 신과 사람 힘 모으고

凌虛天與地同浮 (능허천여지동부) 허공을 능지르니 천지가 함께 떴네.

須知幕府經營手(수지막부경영수) 모름지기 알리라 막부의 경영 솜씨

壯麗非徒鎭一州 (장려비도진일주) 한 고을만 장려하게 진압할 뿐 아님을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들보에는 학봉 김성일이 쓴 <촉석루일절>이 걸려 있습니다.

 

矗石樓中三壯士(촉석루중삼장사)촉석루 안의 삼장사

一杯笑指長江水(일배소지장강수)한 잔 들고 웃으며 남강 물 가리키네

長江萬古流滔滔(장강만고유도도)남강 돌은 넘실넘실 흐르나니

波不渴兮魂不死(파불갈혜혼불사)물결 마르지 않는 한 넋은 죽지 않으리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쟁 당시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분투하며 촉석루에서 읊은 것으로 알려진 이 시에서 삼장사는 김성일과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1537~1597)와 송암(松巖) 이로(李魯·1544~1598)였다고 합니다. 삼장사에 이로 대신 곽재우를 말하기도 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 유권해석을 받아 촉석문과 촉석루 사이에 1963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 비석 건립해 삼장사가 누군지 명확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시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읽어보면 누각에서 바라보는 풍광의 아름다움이 더욱 진한 여운으로 남습니다.

 

 

고개를 들어 누각에 그려진 그림을 보십시오. 누각 대들보에는 용 그림도 있고 학이 날아드는 그림도 있습니다. 신선인 양 유유자적 하는 신선도 있습니다. 찬찬히 누각에 그려진 그림들을 관람하는 동안 마음에는 평화가 일렁입니다.

 

 

아는 만큼 더욱더 명확하게 촉석루가 보입니다.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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