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겨례의 쌀창고, 전북 김제에서 즐기는 농경문화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1. 7.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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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여름휴가철. 어디로  가족끼리 나들이를 갈까 고민이 깊어지고 무더위 탓에 입맛 없는 요즘.

입맛도 돌리는 즐거운 여행지가 있다. 수 천년 동안 우리 겨레의 쌀창고 역할을 해온 곡창지대 전라북도. 곡창지대 전북에서도 농업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이 김제시 벽골제다.

벽골제 같은 것을 두세개만 더 만들어도 굶어 죽는 흉년이 없을거라고 반계 유형원을 말했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님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농사를 위해 꼭 필요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최고(崔古),최대의 수리시설 벽골제.

 

 

사적 111호인 벽골제를 배경으로 이 땅의 농경 문화와 산업을 살펴보는 농경문화 박물관과 단지가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119-1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벽골제농경문화단지를 들어서면 왼편으로 벽골탑과 단야류가 반긴다.

 

 

풍년을 기원하는 제단. 볏집으로 새끼꼬면서 만든 줄들이 풍년을 바라는 마을을 담은듯 하다.

 

 

단야각

 

이렇게 오래되고 큰 제방에 어찌 전설이 하나 없을까.

 

통일신라 원성왕 때 벽골제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때 토목기술자 원덕량이 공사를 힘을 쏟고 잇는 동안 고울 태수의 딸인 단야가 원덕량을 흠모하게 되었다. 큰 공사에는 '용추에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라는 속신이 이었는데 원덕량이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하자 백성들이 공사에 대한 우려가 번져가고 있었다. 그 때 원덕량의 약혼녀 월내가 벽골제에 이르자 태수는 딸 단야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월내를 보쌈하여 제물로 바치고 보수공사도 완공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민다. 아버지의 계책을 알아챈 단야는 자신을 희생하여 제방도 완성하고 원덕량과 월내를 결합시키며 아버지의 살인계획도 막고자 결심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다. 벽골제는 무사히 완공되었고 이 이야기에 근거해 최근에 벽골제에 단야각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다.

 

 

 

 

벽골제 농경문화 박물관.

제1 전시실 농경문화를 비롯 2전시실 생활민속, 3전시실 벽골제언으로 꾸며져 있다.

전통 농경사회의 최대 생업이었던 농경은 경제활동 전반은 물론이고 생활과 문화 전반을 떠받치는 기반이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논과 밭을 가는 모습.

지금은 경운기,트랙터를 이용한 농기계들이 농사를 보다 편하게 하지만 불과 십수년 전에는 사람과 소의 힘으로 논도 밭도 갈아서 농사지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시대 이전부터 근대 이전까지 전통 농경 역사를 디지털 패널로 정리하여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농경의 역사를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친경(親耕)

왕이 몸소 땅을 가는 의례를 말한다. 왕비는 누에를 치는 친잠을 했는데 농사와 잠업이 국가에서 장려했는지 엿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천하지대본이 농업이었음을 확인한다.

 

 

손쉽게 옷을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예전에는 낮에는 지아비를 따라 논과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저렇게 삼베를 짠 우리네 어머들이 있었기에 헐벗지 않고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농경문화를 통해 지난한 삶을 살아온 어머니 세대의 애정을 절로 느낄 수 있다.

 

 

잔밥먹이기

제대로 된 약이 없던 그 시절, 가족 가운데 배알이 병이 나면 그 집의 할머니나 주부가 됫박에 쌀을 담아 보자기에 싸서 병자의 아픈 곳을 쓰다듬으며 치유를 기원하였다.

 

 

 

밥은 전기밥솥이, 빨래는 세탁기가, 다림질은 다리미가 다 해주는 오늘날의 살림살이에 비해 일일이 사람의 손이 필요로 했던  불과 십수년 전의 살림살이를 훔쳐보는 색다름. 그 시절을 헤쳐나온 할머니들은 어떤 생각이 들며 전시실을 둘러볼 지 궁금하다.

 

 

 

나무통

본래 일본식 술·장 등을 담아 숙성시키는 나무통(발효통)이다. 일제강점기 주조공장에서 발효통으로 사용되다가 그후 곡식 저장용으로 활용되어 곡갑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 곡창지역이었던 지역 특성으로 일제강점기에 김제는 일찍이 일본식 청주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ㅁ>형태의 박물관 내부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시원한 분수대가 잠시 관람중 눈과 마음의 피곤을 쉬게 한다.

 

 

박물관에서 바라본 벽골제  단지 풍경.

 

 

벽골제 수문 체험장

이곳은 벽골제 수문을 열고 닫으며 체험해 볼 수 있도록 모형을 제작해 놓은 곳으로 양쪽 제방위에 올라 동시에 물레를 돌리면 수문이 열린다.

 

 

장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라고 한다. 그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에 위치한 경장거다. 1980년대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벽골제의 중요성에 대해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백성의 생명은 먹거리에 달렸고 먹거리는 하늘의 기후에 달렸다. 하늘이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나 그런대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김제의 벽골제 같은 것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졌고 조선 태종때 중수하였다. 봇도랑을 네 곳으로 나누어 논 4만 결을 관개한다. 반계 유형원은 "만일 벽골제 같은 것을 두세곳만 만들어 놓는다면 노령 밖은 흉년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지금은 못쓰게 되어 이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국가가 빈궁하고 백성이 못살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벽골제 모형도

벼농사를 위해 꼭 필요한 물을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에 이용한 지혜를 엿본다.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가  우리의 농업뿐 아니라 도시민들의 휴양지로 손색없는 전국 3,000여개의 저수지를 관리하고 있다.

 

 

벽골제 단지 내에는 푸른 잔디와 함께 각종 정자와 연못이며 그네 등이 가족 쉼터로 손색없이 갖춰져 있다. 테마연못에서는 과거의 향수와 물을 이용한 농업의 체험할 수 있다. 테마연못의 가운데 넓은 섬을 두어 초정과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빙 둘러진 물길을 따라 무자위, 용두레, 맞두레를 설치하여 전래의 물대는 방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각종 야외전시물은 농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대나무와 철골로 만든 높이 15m,길이 54m의 <용>(최평곤 작)

전통사회에서 농사에 필요한 물은 전적으로 자연의 힘이었기에 물을 다스린다는 상상적 동물, 용에 대한 추구도 뿌리깊었다. 벽골제는 물을 제어하는 국가규모의 수리시설이었던 까닭에 역시 용과 관련한 이야기가 많다. 김제 토착세력인 김제 조씨의 시조 조연벽장군의 전설이나 벽골제 쌍룡추, 용추(龍湫)와 용연(龍淵) 등이 그것이다. 본 작품은 벽골제와 생명인 물, 신화와 삶을 연결하는 상징적 고리이다.

 

 

전통마을 체험마을

이곳에는 망해사 낙서전과 동헌 내아, 석정 이정직 생가, 쌀음식체험관 등이 함께해 전통 가옥과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전통가옥에서는 숙박체험을 실시하고, 전통찻집 에서는 전통차,  한방차 등을 판매하며, 주막을 비롯한 쌀음식 체험장에서는 지평선 쌀과 국산 콩 두부를 이용한 순두부국밥, 묵국수, 콩비지해물파전,  무우비빔밥, 청국장, 콩나물비빔밥 등 다양한 옛 전통 음식을 체험할 수 있다. 전통 민속놀이 체험 광장에서는 투호와 고리걸이, 굴렁쇠, 널뛰기, 그네뛰기, 제기차기,윷놀이 등 다양한 민속놀이를 경험할 수 있다.

 

 

 

농경사 주제관과 체험관

신석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농경의 역사를 직접 체험해보며 농경에 사용한 도구의 발달 등을 통해 농업기술을 여행할 수 있다.

이밖에도 벽천 나상목 선생의 <벽천미술관>이 단지내 있다.

 

단지 밖에 길건너에 바로 조정래의 아리랑문학관이 있다.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 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비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

라고 아리랑을 저술한 작가 조정래의 문학작품을  만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김제벽골제 홈페이지 http://byeokgolje.gimj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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