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다시 남명이다7-남명 조식 애제자 덕계 오건과 수우당 최영경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0. 10. 8.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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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명이다7-남명 조식의 애제자, 덕계 오건과 수우당 최영경

 

‘in 서울떠나 천릿길 진주로 내려온 제자

남명 조식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풍경모형(산청 남명기념관)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10리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유배 중이던 1810년 초가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당쟁의 희생자 대부분이 시골에서 은둔을 선택한 것과 달리 다산은 서울 사수를 주장했다. 정보와 네트워크의 중요성 때문에 다산은 자녀들의 서울 생활을 고집했다. 이와 달리 오히려 ‘in 서울’을 탈출, 천릿길 진주로 향한 사람도 있었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이 그렇다. 수우당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온 집안으로 아쉬운 것이 없던 문벌 출신의 서울 사람이었다. 1565년 오직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가르침을 좇아 거처를 옮겼다. 수우당은 남명 문하의 가장 뛰어난 제자를 일컫는 남명오현(南冥五賢) 중 한 명이다. 남명오현은 수우당을 비롯해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5~1623),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 1620)이다. 왜 수우당은 서울을 떠나 천릿길 진주로 내려왔을까?

 

자기 학습 주도 공부의 신’, 덕계 오건

 

서울에서 진주로 가는 길은 가깝다. 대전에서 통영까지 놓인 대전-통영고속도로 덕분이다. 고속도로를 따라 산청군 산청나들목에서 빠져나와 산청읍 쌀고개 한쪽에 있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을 먼저 찾았다. 서원은 마을 사람들이 떡뫼라고 부르는 동산 맞은편에 서계서원이 있는데, 1606년 한강을 비롯한 사림이 덕계를 모시기 위해 세웠다. 1677(숙종3)에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 때 헐렸다가 1921년 다시 지으면서 오건과 함께 오장, 오간, 박문영 등을 모셨다.

덕계는 남명 제자들의 명단을 적은 덕천사우연원록에 가정 먼저 나온다. 1572년 남명 장례식에 덕계는 제자 대표로 동쪽에 먼저 서고 수우당 등이 차례대로 섰다. 덕계는 남명 생존 시 가장 먼저 이름을 떨치면서 후학을 양성한 사람으로 남명 문인의 좌장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처사로 일관한 수우당, 의병장으로 실천가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 학행일치의 삶을 살아온 덕계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참 선비, 덕계 오건을 배향한 산청 서계서원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입덕(入德)’ 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면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강당 뒤편 창덕사로 곧장 향했다. 담장 너머로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과 가락국 마지막 왕의 전설이 깃든 왕산이 보인다. 고개 숙여 예를 올렸다. 창덕사에서 내려와 강당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덕계는 11세에 부친상, 14세 조모상, 16세 조부상, 24세 모친상, 25세 계조모상을 겪었다. 효를 다하기 위해 3년상을 치뤘다. 덕계는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공부를 했다고 한다. 훗날 덕계는 제자와의 대화에서 내가 읽은 횟수로는 <중용>은 부지기수이고, <대학>은 약 일천여회, 제 경사는 모두 4~5백 회 이상에 달한다.”라고 했다. 독학으로 공부했던 덕계는 자기 주도 학습법으로 공부한 셈이다.

큰들 마당극에서 재현한 남명 조식이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남명집> ‘퇴계에게 드림’(與退溪書) 중에서)”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당쟁의 시작, 이조전랑 요직을 박차고 나오다

 

28세 때, 늦은 나이에 성주 이씨와 결혼을 했다. 31세 때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회시에 합격했다. 이 무렵에 남명을 찾아 가르침을 청했다. 덕계는 남명에게 학문뿐 아니라 삶을 통해 출처를 명확히 하는 선비의 자세를 배웠다. 덕계는 경륜을 펼칠 수 있을 때는 나아가 충심을 다하고 그럴 수 없을 때는 물러나야 한다는 출처관이 남명과 닮았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당쟁의 시작인 이조전랑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덕계는 조정 인사 실무 책임자인 이조정랑(吏曹正郞)3번이나 지냈다. 52세 때 이조정랑이 후임자를 천거하는 전랑천거법에 따라 후임에 김효원을 천거했다. 당시 이조참의였던 심의겸이 이를 심하게 반대했다. 이조전랑 천거로 불거져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다. 선생은 정쟁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참 선비

 

덕계는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다.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학자였다. 덕계가 어사 겸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으로 호남을 둘러본 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심해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거나 향리를 떠나니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특히 덕계는 흉년이 든 호남지방의 절박한 상황을 체험하며 시급히 대책을 시행하라고 주장했다. 정책의 시의성을 강조한 셈이다. 남명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는 공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구나라며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산청 서계서원에서 바라본 왕산과 필봉산

덕계는 성주향교 교수로 있을 때 퇴계 이황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퇴계는 덕계를 신뢰했다고 한다. 남명퇴계에게 배우고 두 분에게 인정을 받았다. 선비를 유학의 근본이 되는 학문을 익히고 이를 현실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덕계는 선비다. 덕계는 이론과 실천을 함께한 지행합일의 선비였다.

 

묘소 근처를 돌아 서원 뒤편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바람이 참 달고 시원하다. 서계서원을 나와 진주에 들어섰다. 진주시립 연암도서관을 지나 도동초등학교 못 미친 좁다란 입구에 선조사제비문(宣組賜祭文碑) 150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차 하나 지나다닐 정도로 입구는 좁았다. 지나칠 때 밖에서 본 풍경과 달리 안은 넓었다. 선학산 자락에 있는 마을은 숯골이다.

수우당 최영경을 배향한 진주 도동서당

조선 당쟁의 흑역사, ‘기축옥사에 쓰러진 희생양 수우당 최영경

 

서당 앞에는 수우당 최선생 유허비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수우당은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사름들에게 혹 진귀한 과실이나 맛있는 음식을 받으면 부모와 조부모에게 드리려 손에 쥐고 먹지 않았다고 한다. 수우당은 평생 홍시와 암꿩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버지가 임종에 홍시를 찾았으나 6월이라 올리지 못했고 어머니 병상에 있을 때 암꿩고기를 청했으나 올리지 못했기에 종신토록 먹지 않았다.

1565(명종 20)에 수우당은 서울에서 지리산 산천재를 찾아 남명의 제자가 되었다(수우당실기에 의하면, 1567년 남명을 합천 뇌룡사에서 뵌 것으로 나온다). 항상 스승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겨 곁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병을 앓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72(선조 5) 남명의 부음을 받고는 수우당은 심상(心喪) 3년을 입었다. 배운 바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남명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수우당은 천릿길을 마다치 않고 가족을 이끌고 내려왔다. 옛날에 대나무가 많아 만죽산(萬竹山)이라 불리던 진주 상평동에 수우당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1576년 각재 하항, 영무성 하응도, 진주목사 구변, 월정 윤근수 등과 함께 산천재에서 서쪽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서원을 창건했다.

조선 선조가 수우당 최영경을 제사 지내기 위해 내린 제문을 돌에 새겨 제문비

1589(선조 22) 10월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3년여에 걸친 기축옥사(己丑獄事)’1000여 명의 선비가 역모와 관련되어 죽거나 유배되었다. 수우당도 이때 연루돼 서울로 압송됐고 옥중에서 바를 정()자를 크게 쓴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591년 정철 등 서인들의 모함이 밝혀져 신원 되었다. 1594년 대사헌에 추증되고 1603년 스승인 남명을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남명

배운 바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칼을 품은 남명 조식(사진은 큰들 마당극 중에서)

위패를 모신 청풍사(淸風寺)로 걸음을 옮겼다. 청풍사 문을 열고 잠시 묵례(黙禮)로써 예를 올렸다. 바람(淸風)이 분다. 세상을 맑게 푸르게 바람이 분다. 아는 만큼 사랑하는 게 역사라고 누가 말했던가.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게 남명이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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