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다시 남명이다5-남명과 퇴계 사이, 닮은 듯 다른 삶과 가르침, 남명과 퇴계 사이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0. 8. 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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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릴 적, 마치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고 묻는 뭇사람들의 질문처럼 부질없는 생각을 곧잘 하곤 했다. 경상 좌도와 우도를 대표하는 남명 조식 (南冥 曺植 15011572)와 퇴계 이황 (退溪 李滉 1501-1570) 중 누가 더 뛰어난 선비인지 학자인지 묻는 말도 그렇다.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성호사설> 중에서)”는 성호 이익의 글처럼 조선 유학의 절정에 이른 남명과 퇴계 선생은 왜 서로를 만나지 않았을까.

1501(연산 7) 음력 626일 삼가현 (합천 삼가면) 토동(兎洞) 외가에서 남명이 태어났다. 같은 해 1125일 예안현(경북 안동 예안면) 온계리(溫溪里) 본가에서 퇴계가 태어났다. 같은 해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온 두 사람은 같은 경상도에 살았다.

“퇴계에게 드림(與退溪書) /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요? 인간의 세상사에 좋지 않은 일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걸릴 것이 없는데, 유독 이 점이 제일 한스러운 일입니다. 선생께서 의춘(의령)으로 오시면 쌓인 회포를 풀 날이 있으리라 매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오신다는 소식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늘의 처분에 모두 맡겨야 하겠습니다~갑자년(명종 19, 1564년) 9월 18일 못난 동갑내기 건중(建仲:남명의 자(子) 드림.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옮김 <남명집(이하 <남명집>)”

서로를 그리워한다며 차원 높은 정신적 사귐(神交)을 강조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뿐이다. 왜 만나지 않았을까? 지금과 달리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지만 퇴계의 첫째 부인 허 씨의 집안이 의령이다. 둘째 부인 권 씨의 친정아버지도 함양 안의면에 있었다. 당시 곤양 군수였던 관포 어득강의 초청을 받아 안동에서 사천까지 찾아간 퇴계였다. 퇴계는 아홉 차례 이상 의령을 비롯한 경남 일대를 다녔다. 교통 불편은 핑계도 되지 않는다.

 

풍경과 풍경이 이어진 합천 함벽루에는 남명과 퇴계 시가 마주 보고 걸려

궁금증은 합천 황강 함벽루에 오르면서 다시금 증폭된다. 여름이면 시원한 물놀이로 즐겨 찾는 황강레포츠공원에서 강 너머를 보면 잔잔하게 흐르는 황강 위 기암절벽 사이로 들어앉은 함벽루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진주 남강 촉석루와 밀양 밀양강 영남루에 못지않게 그대로가 한 폭의 그림이다.

황강을 가로질러 놓인 남정교를 건너면 재현한 대야성(大耶城) 문루가 나온다. 대야성은 신라 진흥왕이 백제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해발 90m의 야트막한 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은 성이다. 신라 충신 죽죽 장군의 넋이 깃든 곳이다. 죽죽비(竹竹碑)를 돌아가면 주위 풍경과 풍경이 이어진 함벽루에는 조선 개국공신 조준, 권시경, 김시영, 조진익, 이중하, 송변선 등의 시가 걸려있다. 이 중에서도 남명과 퇴계가 쓴 시 2편은 들보에 편액으로 내걸려 서로 마주하고 있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왼편에 남명의 시가 초서체로 쓰여 걸렸다. (<남명집>)

‘喪非南郭子 남곽자처럼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해도 / 江水渺無知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 欲學浮雲事 뜬구름의 일을 배우고자 하나, / 高風猶破之 오히려 높다란 바람이 흩어버리네.‘

맞은편에 퇴계 시가 해서체로 쓰여 있다. (점필재연구소 정석태 번역)

‘北來山陡起 東去水漫流 북에서 뻗어 내린 산들은 우뚝 솟고 동으로 질펀하게 강물은 흘러가네 / 鷹落蘋洲外 烟生竹屋頭 기러기 마름 자란 모래톱에 내려앉고 대숲 속 집 위로는 저녁밥 짓는 연기 / 閑尋知意遠 高倚覺身浮 한가로이 찾는 마음 느긋하기 그지없고 높은 곳에 기대서니 몸은 둥실 떠오르네 / 幸未名韁絆 猶能任去留 다행스레 벼슬길에 이름 아직 걸지 않아 가거나 머무는 것 이렇게 자유롭네!’

 

바다와 개울처럼 서로 존중했으나 기질은 달랐다

남명이 <장자>에서 따온 남쪽의 큰 바다(南冥)’를 호()로 삼았지만 퇴계는 개울에서 물러난다(退溪)‘라는 의미를 품었다. 바다와 개울의 크기와 상징성만큼이나 두 사람의 거주지가 지닌 역사도 다르다. 남명이 활동한 경상 우도는 진주를 중심으로 한 변한지역에서 가야가 되었다가 신라에 흡수되었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 좌도는 진한지역에서 신라로 발전한 지역이다.

남명과 퇴계는 서로 존중했으나 기질은 분명 달랐다. 퇴계는 남명을 일컬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다라고 했고, 남명은 퇴계를 일러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천 리(하늘의 뜻)를 담론하고 허명을 훔친다.”라고 비판했다. 남명학파는 정인홍, 최영경, 곽재우 등이고 퇴계학파는 류성룡, 김성일, 기대승 등이 형성했다.

 

이승에서 못 만난 남명과 퇴계, 산청 배산서원에서 만나다

이승에서 못 만난 이들도 사후에는 산청 배산서원에서 만났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단성면 소재지를 살짝 벗어나면 목화시배지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 옆으로 합천 이씨 세거지배산서원(培山書院) 입구를 알리는 빗돌이 나온다. 표지석에서 200m 마을로 들어가면 홍살문이 나온다. 여느 홍살문과 달리 가운데 태극문양 좌우에 녹색의 대나무와 책 같은 그림이 한 쌍씩 그려진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 오른쪽 은행나무 아래에 복원유교지본산(復元儒敎之本山)’이라 쓰인 표지석이 있다. 청말 사회 개혁을 위해 변법자강운동을 벌인 캉유웨이(강유위康有爲)의 유일한 손자가 배산서원을 방문해 쓴 글을 새긴 글이다.

배산서원을 건립한 진암(眞庵) 이병헌(李柄憲1870~1940)은 일제강점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통 유교를 종교화해야 되살릴 수 있다며 '유교의 종교화'를 폈던 유교개혁사상가다. 진암은 향교식(鄕校式) 유교가 아닌 종교식 유교를 보급하려고 노력했다. 서원에 공자의 문묘(文廟)를 세우고 아래에 다시 도동사(道東祠)를 지었다. 남명을 남명조자(南冥曺子)로 퇴계를 퇴계이자(退溪李子)로 극존칭으로 모시고 자신의 선조인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을 청향당이선생(淸香堂李先生)으로 나란히 봉향(奉享)했다. 왼쪽에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를 종향(從享)했다.

청향당과 남명·퇴계는 동갑내기다. 청향당과 남명, 청향당과 퇴계는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 청향당은 18세에 남명과 산사에서 <주역>을 읽었으며 김해 산해정을 찾아가거나 아들 이광곤과 조카 죽각 이광우를 남명에게 보내 배우도록 하는 등 절친한 친분을 쌓았다. 21세 때에는 의령 이 씨에게 장가들어 처가에 갔다가 퇴계 이황을 만났다.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고 방문했다. 청향당은 죽각을 퇴계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기도 했다. 퇴계가 의령 처가 일을 청향당에 맡겨 처리하기도 했다. 퇴계가 단성에 사는 청향당을 찾은 적이 있지만, 단성에서 멀지 않은 덕산에 기거했던 남명을 찾지 않았다. 청향당도 두 사람이 만나도록 주선하지 않았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 듯 남명과 퇴계도

 

남명은 청향당을 일러 나이, 마음, , 가 같다고 했다. 4가지가 같은 청향당과 달리 퇴계와는 뭐가 달랐을까? 못 만난 게 아니라 안 만난 남명과 퇴계. 문묘를 나와 서원 뒤편으로 난 길을 걸으면서도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의문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로 바뀐다. 서로를 의식했던 팽팽한 경쟁 관계는 서로가 더욱더 긴장하며 학문 정진과 배운 바를 실천하는 자기 다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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