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다시 남명이다8-의리 사나이 내암 정인홍, 그 스승에 그 제자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20. 11. 4.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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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명이다! (8)그 스승의 그 제자, 내암 정인홍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은 사나이, 내암 정인홍

 

엉덩이가 들썩이는 가을이다. 어디로 떠나도 좋을 때다. 훅 가버릴지 모를 가을을 머금은 합천 가야산 소리길은 가을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가야산 해인사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가을과 팔만대장경 못지않게 들러봐야 할 곳이 있다. 단재 신채호가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우리나라 삼걸(三傑)로 꼽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을 만날 수 있다.

 

내암은 정인홍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을 빼닮은 수제자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일 일어나자 발발하자 영남 의병대장으로서 선봉에 서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광해군 집권기에는 대북세력의 영수로서 산림 정승의 위명을 높이 떨치기도 했다.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 세력에게 정치적으로 패배했다. 구데타 세력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했다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구실로 88세가 되던 해 참형하고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했다. 이후 285년간 서인과 노론 주도의 조선 후기 내내 ‘패륜 역적’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의리의 사나이 내암 정인홍의 흔적을 찾으면 남명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난다.

 

정인홍이 있어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있는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1536~1623)의 부음정(孚飮亭)

가을빛을 머금은 가야산에 다가가면 산 능선 사이로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가야산 주봉인 상왕봉 아래에 이르면 가야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팔만대장경 테마파크 앞에 '부음정(孚飮亭)'이 있다. 내암이 45세 되던 해(1580, 선조 13), 생가 옆에 정자를 지었다. ‘부음정'믿음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 허물이 없다(有孚于飮酒無咎)'라는 <주역>에서 따온 말이다.

 

부음정은 단순히 주위 경치를 즐기며 술을 마시는 정자가 아니다. 믿음의 정치, 신뢰의 정치를 꿈꾼 조선 선비의 바람과 다짐이 스며있다. 부음정은 황산리 생가가 아닌 가야천 건너 야천리 현재의 자리로 광복 이후 옮겨졌다. 부음정 뒤에는 내암을 모신 사당인 청람사가 있다. 내암은 열다섯에 남명 문하에 들어 "덕원(德遠, 정인홍 자())이 있으니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남명의 기대를 받았다.

 

남명 조식, 수제자 내암 정인홍에게 칼을 주다

 

경의(敬義)’는 남명 조식 사상의 핵심이다. ()은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이다. ()는 주어진 상황에서의 가장 옳고 마땅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남명은 성성자(惺惺者)라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방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스스로 경계했다. 늘 깨어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또한, ‘안으로 밝게 하는 것이 경이요(內明者敬), 밖으로 결단하는 것이 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진 경의검(敬義劍)을 품고 다녔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불의를 칼로 자르듯 정의를 실천하려는 다짐이었다. 정인홍도 돌아가신 스승 남명 조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祭先師南冥曺先生文)’에서 오직 경과 의로써(惟敬與義) 처음부터 끝까지 행하셨습니다(以之終始)’라고 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말년에 내암 정인홍에게 경의검을 주는 모습을 재현한 큰들 마당극 <남명>.

남명은 말년에 애제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에게 성성자(惺惺子)’를 물려주고 내암에게는 경의검(敬義劍)’을 주었다.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삼가 하라는 뜻도 함께 물려주었다.

 

이론은 그만 이제 배운 바를 실천하자

 

남명은 주희 이후에는 더 이상 유학 관련 저술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론은 완성되었으니 배운 바를 실천하자는 태도였다. 내암 역시 공자와 맹자, 증자와 자사의 책을 외우면서도 그 말만 숭상하고 실천하기를 숭상하지 않으며, ()에만 힘을 쓰고 실()에는 힘을 쓰지 않아서 몸과 책이 나뉘어 둘이 되고, ()과 행()이 서로 관련이 없게 됨으로써 처음에는 자신을 잘못되게 하고 결국에는 나라를 잘못되게 한다.(<내암집> 중에서)”라고 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안으로 밝게 하는 것이 경이요(內明者敬), 밖으로 결단하는 것이 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진 경의검(敬義劍)을 남명 조식은 품고 다녔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불의를 칼로 자르듯 정의를 실천하려는 다짐이었다.(남명기념관 전시 중인 경의검)

남명은 처가인 김해에 살면서 일본 해적(왜구)들의 노략질을 목격하고 임진왜란 발발 20여 년 전부터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치며 시험을 봤다. 이런 까닭에 남명의 제자 중에는 의병장이 많았다. ‘를 중시하는 남명의 사상은 상무정신(尙武情神)으로 표출되었다. 임진왜란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동문수학한 곽재우 등과 함께 의병장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경상우도 의병들을 총지휘하는 영남의병도대장(嶺南義兵都大將)을 맡은 내암은 적의 후방을 교란 일본군의 낙동강 보급선을 차단하고 호남 진출을 막았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안전하게 지켰다.

 

벼슬에 나아가면 반드시 하는 것이 있고, 물러나면 반드시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남명의 제자들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선 모습.(큰들 마당극 <남명>)

그 스승에 그 제자답게 내암은 스승인 남명이 중종과 명종 선조 대에 걸쳐 열두 번의 벼슬을 사양했듯 여러 차례 벼슬에 추대되었지만 사퇴했다.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 때는 정1품인 우의정을 열다섯 차례, 좌의정 한차례, 영의정을 세 차례나 사양하며 고향 합천에 은거하며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위상을 상대적으로 부각하려는 마음이 앞서 퇴계 이황 제자들의 반감을 샀다. 77(1611) 때 의정부 우찬성을 제수하자 사직상소를 올리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회재 이언적퇴계 이황의 출처 문제를 문묘 출향을 주장(회퇴변척晦退辨斥)했다. 이 상소문으로 퇴계의 후학들이 주류를 이루던 성균관 유생들과 갈등을 빚어 성균관 학적부에 삭제되고 퇴계학파와 깊은 골을 이루었다. 스승과 '남명학'을 터부시하는 결과를 만든 원인 제공자라고도 비판받기도 했다.

 

승리자가 쓴 기록 너머를 보면 내암은 진정한 의리의 사나이였다. 의병으로 국가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왕에 대한 의리로 광해군을 보필했으며 스승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내암의 스승인 남명은 비판자의 위치에서 현실에 대응하는 처사의 삶을 살다 죽었다. 내암 역시 스승의 궤적을 밟으려 했다. 왕과 스승에 대한 의리를 다하고 원칙에만 충실하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광해군 때 북인은 집권정파였지만 소수파였다. 소수파의 한계는 타 정파와 협조할 수 있는 정치력이 필요했다.

 

정인홍 역적으로 몰려 참살당하자 북인정권 몰락과 함께 남명학파도 쇠락

 

내암 정인홍의 부음정에서 가야산 가야산으로 가는 홍류동 계곡길은 ‘소리길’이다. 이 길 끝자락에서 남명 조식을 만날 수 있다.

원칙과 신념을 위해 굽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내암은 역적으로 몰려 참살당하고 북인정권 몰락과 함께 남명학파도 쇠락했다. 부음정을 나와 해인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음정에서 홍류동 계곡 입구는 가까이 있다. 홍류동 계곡 길은 '소리길'이다. 이 길 끝자락에서 남명을 만날 수 있다.

 

남명은 57세 때인 1557(명종 12), 보은 속리산에 있는 친구 대곡 성운을 방문했다. 거기서 보은 현감으로 있던 동주 성제원을 만났다. 팔월 한가위 때 합천 해인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남명이 걸었던 길을 따라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세월 가는 소리를 들으며 2시간여 만에 도착했다. 오늘과 달리 당시 남명 조식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더구나 길 나서기 3일 전부터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친구와의 1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떠났다.

 

남명은 해 질 녘에야 해인사 일주문 앞에 닿았다. ‘“자경(子敬)!” 자경은 동주의 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동주가 굽어보니 남명이 일주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잠시 말없이 웃었다.(<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중에서)’ 서로의 신의를 확인한 두 분은 오던 비가 밤이 되자 개고 바람도 잠잠하자 둥실 떠오른 한가위 달빛 아래 밤새도록 학문과 선비의 자세, 국가를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한다.

 

사람의 글, 배움의 길을 일러준 우리 시대의 스승

 

남명 조식이 후학을 양성했던 합천 뇌룡정 앞에 있는 ‘남명 흉상’

친구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풍 속을 헤치고 길을 나선 남명 조식은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기려고 치열하게 노력한 지식인이다. 사람의 글, 배움의 길을 일러준 우리 시대의 스승이다. 424일 자 경남도민일보에 다시 남명이다를 시작하며 왜 다시 남명 조식인가?’라는 물음을 찾아 남명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길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선생의 흔적 속에서 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항거했던 우리 경남인 기질을 엿보았다. 능력 부족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가르침을 엉뚱한 길로 안내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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