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저처럼 맑고 밝구나.”
1572년 2월 8일,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은 문병 온 제자들에게 창문을 열게 했다. 그런 다음 벽에 써둔 ‘敬義(경의)’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이 두 글자는 학자에게 지극히 절실하고 중요하다. 요점은 이 공부를 익숙히 하는 데 있다. 익숙하면 흉중에 하나의 사물도 없게 된다. 나는 아직 이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 라며 숨을 거두었다.
남명 조식 선생 영정. 창전 조원섭 화가가 그리고 오른쪽 ‘남명 조식선생 화상찬’이라는 글은 한강 정구가 지은 글로 오산 강용순이 글씨를 썼다.
남명선생을 뵈러 가는 길은 바람이 매서웠다. 며칠 사이의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다. 선생께서 닮자했던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은 밤 근무의 피곤도, 세찬 바람도 잊게 한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목은 덕산 입구에 이르자 선생께서 61세(1561년, 명종 6년)에 진주 덕천동(산청군 시천면)에 지은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 오가는 길 양쪽에서 반긴다. 먼저 산천재(山天齋)로 향했다. 들어서는 입구에 눈에 익은 시 한 편이 새겨진 시비가 보인다. 산천재 벽에 써 붙인 ‘천석종(千石鐘)’이다.
산청 산천재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 없다오(非大구無聲‧비대구무성)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1석(섬)은 약 144kg이다. 1,000석은 144,000kg, 144t이다. 이렇게 큰 종(大鐘)은 웬만하게 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더구나 지리산처럼 하늘이 때려도 울지 않고 버틸 수 있길 기대하는 선생의 기상이 엿보인다.
산청 덕산에서 바라본 지리산
시를 나지막이 읊조리며 들어서자 먼발치에서 지리산이 와락 안긴다. 아쉽게도 지리산 천왕봉은 나만 찾지 않았다. 구름도 함께였다.
산천재를 나와 길 건너 기념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념관 정문인 성성문(惺惺門)을 지나자 불현듯 방울(惺惺子)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늘 자기를 깨우쳤던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명선생이 차고 다닌 성성자와 경의검(남명기념관).
성성문 왼쪽에 선생의 동상과 명종이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 비 등이 있다. 맨 왼쪽에 신도비(南冥曺植神道碑)가 있다.
산청 남명기념관에 있는 남명선생 동상과 신도비 등의 비석
1615년 남명 조식의 제자였던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이 신도비를 세웠다. 1623년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자 북인 영수였던 정인홍이 지은 신도비를 없앴다. 이후 남인의 영수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글을 받아 신도비를 세웠다. 덕천서원 유림 중 서인 계열은 서인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에게 신도비 글을 부탁했지만 이미 미수의 신도비가 있어 선생의 고향은 합천 삼가에 있는 용암서원 뜰에 묘정비로 세웠다. 1926년 미수가 지은 신도비를 쓰러뜨리고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를 남명 묘소 가는 길에 세웠다.
산청 남명기념관 뜨락에 있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명선생 신도비
선생의 바람을 담은 ‘천석종’과 달리 신도비는 가볍다. 옮기는 과정이 시류에 휩쓸렸다.
단성사직소를 옮겨 새긴 비석으로 걸음을 옮겨 찬찬히 읽었다.
“~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돌아섰습니다. 큰 고목이 100년 동안 벌레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지 이미 오래입니다. ~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남명기념관에 있는 남명선생 동상
명종은 자신을 한 고아에 불과하고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구중궁궐의 한 과부라고 한 내용에 격분했다. 결국, 언로를 막을 수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 명종은 벌을 줄 수 없었다.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모형
기념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묘소로 가는 오솔길이 나온다. 오솔길이 불편하다면 기념관을 나와 길을 따라 20여m 덕산으로 가면 집들 사이로 묘소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에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350m 정도 올라가면 묘소가 나온다.
남명묘소로 가는 길
묘소 맨 아래에는 선생의 소실 송씨 묘소가 있다. 부인 송씨는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서 모신 분으로 1610년 7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묘비에는 ‘봉숙부부인송씨지묘(封淑夫人宋氏之墓)’라 적혀 있다.
남명묘소와 부인 송씨묘(아래쪽)
송씨는 선생 50세 때 19살의 나이로 소실이 되었다. 선생은 22세에 충순위 조수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처가 김해에서 어머니 인천 이씨를 모시며 산해정을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어머니 돌아가시자 선상에 모시고 3년상을 치룬 뒤 48세되던 해 고향 합천 삼가로 돌아왔다. 이때 부인 조씨는 김해에 그대로 살기를 원해 삼가로 가질 않았다. 홀몸으로 삼가에서 생활한 셈이다. 당시 지역 선비였던 송린(1509~1573)의 딸을 소실로 맞았다.
남명선생 소실 송씨의 묘. 지금 선생의 후손들은 두 분 사이에서 난 자손들이 번성해 선생의 덕을 기리고 있다.
비석에는 선생께 시집와서 사람을 대할 때 신분에 차별 없이 한결같이 온화하고 엄중하게 대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 선생의 후손들은 두 분 사이에서 난 자손들이 번성해 선생의 덕을 기리고 있다.
잠시 숙부인 조씨 묘소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예를 올렸다. 선생의 묘로 걸음을 옮겼다. 선생 묘 앞 한쪽에는 3개의 비가 외따로 떨어져 세워져 있는데 현재의 묘비가 세워지기 전에 있던 비다.
남명묘소 앞 한쪽에는 3개의 비가 외따로 떨어져 세워져 있는데 현재의 묘비가 세워지기 전에 있던 비다.
원래는 대곡 성운(大谷 成運)이 지은 비문을 세웠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글씨가 마모되자 현재의 비석으로 바꿔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 때 총격전의 흔적이 비석에 박혀있다.
“處士(처사)라 하는 것이 옳다.”
남명묘소
남명 조식 선생은 72세 되던 1572년 정 월, 병문안을 온 제자 동강 김우옹이 “만약 돌아가신다면 마땅히 무엇으로 칭해야합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뜻하는 처사로 불리길 원했던 선생의 바람과 달리 묘에는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고 적혀 있다.
선생의 부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宣祖)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사간원 대사헌(司諫院大司諫)에 증직했다. 광해군 7년(1615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영연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 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로 추증되고, ‘文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남명묘소 앞 묘비.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뜻하는 처사로 불리길 원했던 선생의 바람과 달리 묘에는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고 적혀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길다란 묘비명이 아니라 선생 바람처럼 ‘처사조남명지묘’라고 적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배여 온다. 왼손이 위로 오게 두 손을 몸 앞에 모으고 허리를 75도로 굽혀 예(국궁배례⸱鞠躬拜禮)를 올렸다.
묘소에서 덕천강을 보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선생의 생애를 떠올렸다.
합천 용암서원 앞에 있는 남명선생 흉상
‘처사(處士) 조식(曺植)이 죽었다. 조식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니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조언형(曺彦亨)의 아들이다. ~ 하루는 글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의 ‘이윤(伊尹)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顔淵)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말하기를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萬古)를 밝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 가지 말이 그 귀취(歸趣)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합천 삼가에 있는 남명선생 생가
~ 만년에는 두류산(頭流山)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精舍)를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편액(扁額)하고 여생을 보냈다.
중종조(中宗朝)에 천거로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 금상(今上)이 보위를 이음에 교서(敎書)로 불렀으나 노병(老病)으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시폐(時弊) 열 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 임신년에 병이 심하자 상이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큰들에서 공연 중인 마당극<남명>의 남명선생
~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자들이 남명(南溟)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2월 8일 을미 1번째기사 1572년 명 융경(隆慶) 6년)‘
큰들에서 공연 중인 마당극<남명> 중에서 남명선생이 제자 한강 정구에게 자신의 성성자를 건네주는 모습.
바람이 얼굴을 훑고 간다. 차디찬 바람이 아니라 달곰하다. 머리를 헹군 듯 맑고 깨끗하다. 선생의 ‘偶吟(우음.우연히 읊다)’이 떠오른다.
남명묘소에서 바라본 풍광
바른 선비 사랑하는 사람들 태도는(人之愛正士⸱인지애정사)
범 가죽을 좋아함과 정말 똑같다(愛虎皮相似⸱애호피상사).
살아서는 죽이려고 대들다가도(生前欲殺之⸱생전욕살지)
죽은 뒤에 아름답다 모두들 칭송하네(死後皆稱美⸱사후개칭미).
큰들에서 공연 중인 마당극<남명> 중에서 남명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에 출전하는 모습
선생은 죽는 그 날까지 곧고 바른 행동을 하면서 충실하게 살아가면 죽은 뒤 이름과 함께 정신이 남을 것을 아신 분이다. 죽어서도 살아 있는 분이 남명 조식 선생이다.
남명선생의 일대기를 그린 창작 오페라 <처사 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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