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사천명소,그날을 잊지 말라고 도와주는 고마운 흉터를 찾아서 - 사천 세종‧단종 태실지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4.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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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추운 겨울을 잊지 말라는 듯 꽃샘추위로 춘분에 눈을 내리며 다가온 봄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한다. 꽃샘추위가 가버릴 겨울의 흔적이라면 아픈 역사의 흉터를 찾아 나섰다. 세종대왕과 단종대왕 태실지가 바로 그곳이다. 진주에서 하동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완사지나 매화교차로에서 송림리,성방리,작팔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송비산(松飛山) 기슭이 나오는 송림마을에서 곤명중학교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예전에 난()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숨어서 살았다는 은사리 쪽으로 가는 삼거리에 이르면 3km가량 더 가면 나온다.

 



 

소가 밥그릇(구시)을 안고 배부르게 누운 지형곡(地形谷)이라 하여 동명(洞名)"구시골"이라 불리어 오다가 그 후 구시()가 구슬()로 바뀌어서 옥동이라 불린 옥동마을에 이르자 세종대왕태실지가 먼발치에서 보인다.

 



 

옥동마을 표지석에서 완사천을 건너 300m가량 차 하나 겨우 다닐 시멘트 길을 따라가면 세종대왕 태실지가 나온다. 완사천 따라 태봉산(당시 소용산)으로 들어가면 산 기슭 경사지에 철재 울타리로 둘러쌓은 곳이 나온다. 세종대왕 태실지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에게 생명을 준 것이라 하여,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조선 왕실은 국운과 관련 있다며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태를 봉안할 명당을 물색한 다음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태 역시 왕위에 오른 1418년 여기에 봉안되었다.

 

동아시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선조와 영조 때 정비했다.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 태실이 조선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전국에 있던 왕실의 모든 태실을 경기도 양주로 옮기고 태실이 있던 땅을 모두 민간에게 팔았다. 이곳에 있던 세종대왕 태실도 이때 양주로 옮겨 갔으며, 지금은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영조 때 세운 世宗大王胎室(세종대왕태실)이란 비가 거북을 기단으로 서 있다. 주변에 흩어진 석조물을 통해 이곳이 세종대왕 태실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세종대왕 태실지를 나와 1km 이내에 있는 단종태실지로 향했다. 세종(世宗)이 사랑했던 단종의 태실을 나의 태실 옆에 만들도록 어명 했다에 따라 여기에 만들었다고 한다.




 

들어서는 입구에 납작 엎드러 활짝 튀어 오늘 개구리 형상의 바위가 반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 사이로 들어서자 하늘이 열렸다. 소나무가 호위하고 하늘 향해 열린 곳은 사천 지역을 대표하는 친일파로 1933년부터 11년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1944년 국민총력동맹 등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벌였다.’ 라고 인터넷 워키백과(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7%B0%EA%B5%AD)에서 소개하는 최연국의 묘가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 몸에 실을 비를 잃은 채 어금니를 앙다문 거북이가 보인다. 주인 잃은 널브러진 돌들이 슬픈 흉터 자국으로 남는다.

 


한편, 여기에 묻혔던 태는 단종이 아니라 단종의 사촌인 예종의 장남인 인성대군 태실지(仁城大君胎室址)라는 주장이 있다. 단종의 태 항아리는 사천을 떠나 서삼름으로 옮겨졌는데 막상 서삼릉에는 단종 태실이 없다. 그 자리에 인성대군이 대신한다.

 

3살에 요절한 왕자의 태실이었기에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잊혔다가 세종대왕 태실과 관련되어 단종 대왕의 태실로 잘못 전해졌다. 숙종이 단종의 태실을 이곳이라 정하고 가봉(加封)할 대 석함 내부는 조사하지 않고 잘못된 구전을 믿고 인성대군 태실을 단종 태실로 가봉한데 있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고 그날의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 단종의 슬픔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외세에 짓밟힌 우리의 슬픈 흉터다. 그날을 잊지 말라고 도와주는 고마운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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