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사천 숨은 명소-1000년 전 간절한 바람을 느끼다-사천매향비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3. 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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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도 잊었다. 역사의 시간을 씨실과 낱실로 엮은 세월이 자그마치 1000년 넘는다. 그만큼 오래된 기억을 간직한 바위가 보고 싶었다. 1000년 후 희망을 바랐던 미륵의 땅을 찾아 사천 매향비로 향했다.

 



 

남해고속도로 축동나들목을 빠져나와 가화강을 건너자 중항과 진교곤양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곤명쪽으로 빠졌다. 이 길을 따라 1.5km가량 더 들어가면 매향비가 나온다.

 



빗돌은 멀구리마을 앞을 흐르는 소하천(默谷川) 건너에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 있다. 들어가는 입구는 온통 상수도관 매설공사 등으로 어수선하다. 설레는 마음을 지나는 소슬한 바람이 어수선함도 잊게 한다.

 



 

주위는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다. 여기 사천 매향비가 있는 자리도 옛날에는 인근 사천만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었다. 풍력발전용 파랑개비가 바람을 맞아 힘차게 돌아간다. 그 아래에 있는 매향비에 섰다.

 



 

보호각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보물 제614호인 매향비는 마치 옆에 있는 큰 바위를 툭 쳐서 깬 뒤 만든 것처럼 보인다. 빗돌은 재질이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주위에 쉽게 볼 수 있는 무른 재질인 퇴적암이다.

 

매향비가 세워진 고려 말기는 귀족과 왜구 탓에 민중은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더구나 고려 말 한 해 평균 27회나 침략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이상 왜구의 침략을 겪는 민중은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567000만 년 뒤에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을 간절히 염원했다.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매향(埋香침향(沈香)의식을 하고 여기에 흔적을 세운 셈이다. 좋은 향나무를 골라 다듬어 펄 속에 묻어두면 천 년이 지난 후에 향 가운데 가장 귀한 침향이 된다고 믿었다. 갯벌에 묻어 만드는 매향(埋香침향(沈香)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하고 향기는 비길 수 없이 감미롭다. 미륵불에게 바치는 공양물로 으뜸인 셈이다.

 

매향 하기 위해 수백에서 수천 명이 매향계(埋香契)를 맺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은 고려 충선왕 1(1309) 강원도 고성군 삼일포 매향비, 조선 태종 5(1405) 전남 신안군 암태도 매향비, 세종 9(1427) 충남 서산 해미 매향비 등이 있다.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사천 매향비는 고려 우왕 13(1387)에 세워졌다.




 

높이 1.6m, 너비 1.3m의 부정형 형태의 빗돌에는 15202자의 글이 음각되어 있다. 승려와 신도 4100명이 계를 이루어 세상이 평안하길 바라며 매향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래는 사천시사에 나오는 비문 내용이다.

http://jdpaper.ciclife.co.kr/sub.html?w=body_02_01&style=02&idx=951&num=3498&_view=view)

 

1. 千人結契埋香願王文/

2. 夫欲求无上妙果必須行願相扶有行无願其行必/

3. 孤有願无行其願虛設行孤則果喪願虛則福劣二業/

4. 双運方得助妙果貧道與諸千人同發大願埋/

5. 沉香木以待 慈氏下生龍華三㞧持此香達/

6. 奉獻供養弥勒如來聞淸淨法悟无生忍/

7. 成不退地願同發人盡生內院訂不退地慈氏如/

8. 來見爲我訂預生此國預在礿㞧聞怯悟/

9. 道一切具足成其正覺/

10. 主上殿下萬萬歲國泰民安 達空/

11. 洪武廿年丁卯八月廿八日埋 刻金用/

12. 優婆塞優婆夷此丘此尼 書守安/

13. 大化主覺禪/

14. 都計四千一百人 個中/

15. 宝上/

 



 

천인결계 매향 원왕문

 

무릇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결과를 바란다고 한다면, 간절하게 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반드시 서로 일치되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만약 간절하게 바라는 바도 없이 행동만 하게 된다면, 그 행동은 아무런 호응도 없는 외로운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무런 행동도 없이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그러한 소원과 바램 역시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누구도 호응하여 주지 않는 고독한 행동은 죽은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허망하게 비는 소원은 결과적으로 그 복이 빈껍데기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간절하게 원하는 것과 더불어, 둘째 많은 이들이 호응하는 행동의 움직임, 이 두 개의 기운이 함께 해야 원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소승은 이러한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침향목(沉香木)을 묻으면서 먼저 커다란 소원을 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륵여래님이 이 세상 낮은 곳으로 내려와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이루신다는 용화법회를 세 번이나 개최하였고, 지금 그러한 세계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이 향을 묻어 미륵여래님에게 봉헌하여 공양하고자 합니다. 미륵여래님의 청정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이 인생의 인고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아무도 이 땅에서 물러서지 않고 이 땅을 지켜나갈 것임을 모든 사람들이 뜻을 합하여 대동발원(大同發源)합니다.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목숨을 다하여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며, 이 땅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당신께서 보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나시어서 이 약회(禴會) 위에 계시면서 당신의 진리를 듣고 깨닫게 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르게 깨닫도록 하고 계십니다.

 

무궁하도록 임금님의 만세와 나라의 태평성대, 그리고 백성의 편안함을 비옵니다.

 

고려 우왕 13(1387) 정묘 828일에 묻다.

 

글 지은이 달공, 글 쓴이 수안, 글 판이 김용

기혼 미혼 남녀 불자 도합 4,100인 대표 대화주 각선

천지신명(-,,)에 올림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합장을 했다. 그렇게 천년이 넘게 지나야 올 미륵불을 기원한 민중은 당대의 자신과 이웃보다는 후대의 우리를 위해 묻은 것은 아닐까. 천 년 전에 간절히 염원했던 고려 민중의 바람이 바위 너머 나에게 전해지는 느낌이다.

 



 

머리 위로 독수리가 하늘을 헤엄치듯 날아다닌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전깃줄 위를 아주 높게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아래에서는 오선지를 뛰노는 모양새다.

 



 

매향비 안에 숨어 있던 시간의 흔적을 찾는 시간이었다. 빗돌은 당시 민중의 삶과 역사를 기억하며 버티어 여기를 찾은 나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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