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겨울 때를 씻고 싶었다. 봄을 맞아 마음을 개운하게 만들고자 영험하다는 돌장승을 찾아 길을 나섰다.
남해고속도로 축동나들목을 나오자마자 만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곤양 방향으로 300m가량 들어가면 가산오광대를 알리는 선간판이 나온다. 들어서면 가산리 마을 입구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바로 향나무와 느티나무 사이에 금줄이 쳐진 아래로 석(石)장승이 나온다.
며칠 전 정월 대보름날 동신제를 지낸 흔적이 있다. 여기 가산리는 가화강과 사천만이 만나는 곳으로 조선 영조 36년(1760)에 설치한 가산창(駕山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었다. 이웃한 진주, 곤양, 하동, 단성, 사천 등지의 조세(租稅)를 수납해 바닷길을 이용해 서울로 올려보냈다.
세곡선의 무사 운행을 기원하며 돌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마을 어귀와 650m가량 떨어진 당산나무 아래에 남장승 한 쌍과 총각장승 한쌍씩 등 모두 네 쌍의 돌장승이 서있다.
화강석을 조각한 높이 1.2m, 너비 50㎝, 두께 30㎝의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은 문인석 모습이다. 오른쪽 장승 키가 더 큰데 왼쪽 장승의 턱에는 굵은 수염이 세 가닥 나 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높이 80㎝, 너비 30㎝, 두께 20㎝의 총각장승은 머리에 상투를 틀고 관복을 입고 있다. 특이하게도 머리에 뿔과 같은 돌출부가 2개 솟아나 있다. 눈썹이 짙고, 큰 귀다. 이에 비해 입은 작다. 여기 총각장승은 도둑맞아 1980년 다시 세운 것이다.
어찌 보면 상투가 아니라 우주와 통신하는 안테나를 단듯한 모습이라 경건한 모습과 달리 바라보는 나는 그냥 웃음이 살포시 났다.
근처 홍매화가 흔들흔들 다가선 봄을 반긴다. 매화도 팝콘처럼 튀길 준비를 하는 길을 따라 마을 가운데에 있는 돌장승 만나러 갔다.
조창이 폐쇄된 이후 조창을 보호하는 원래 역할 대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 매년 음력 정월초하루에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장승제가 거행된다. 장승제가 끝나며 ‘가산오광대’ 공연이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에도 정월 대보름 장승제가 열린다.
당산나무 아래 돌장승을 만나러 가는데 고속도로 아래를 가로질러에 가산오광대 전수관 안내판이 나와 방향을 잠시 돌렸다. 합천 초계 밤마리 대광대패의 탈놀이에서 영향을 받은 가산 오광대는 모두 6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야외 공연장 앞에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수관 너머로 진주 진양호에서 흘러나오는 가화강이 보인다.
인근의 매화나무 밭에서 매향에 취할 무렵 가산천룡제당(駕山天龍祭堂)으로 걸음은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제당 옆에 있는 천룡제 진혼가를 새긴 빗돌에 섰다. 천룡제는 천룡제 진혼가를 부르며 성환신께 제사를 지내고 석장승으로 이동해 제사를 지내고 지신밟기와 오광대 놀이로 250년이 넘게 이어지는 전통 문화다.
“해동 조선국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정월 보름 천룡신께 마을 안녕 고하노니 천룡신 비나이다 비나이다~”로 시작하는 천룡제 진혼가는 “~정월맹춘이라 입춘 우수 절기로다 아낙들은 밭일 가고 남정네들은 바다로 나가 어이여차 풍년일세 어이 여차 만선일세”로 끝난다.
읽는 동안 나 역시 풍년을 기원하고 만선을 기원했다. 더불어 우리 가족의 안녕과 소원을 빌었다.
전수관을 나와 마을 중앙으로 향하자 산비탈 아름드리 당산나무 아래에 세워진 돌장승이 나왔다. 여기 돌장승은 마을 어귀 돌장승과 비슷하다. 장승 아래쪽에 언덕 흙을 움푹 판 벽감(壁龕)이 있다. 당산나무 아래에 서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은 공손하게 모여지고 합장을 한다. 내 안에 빌고자 하는 바람이 컸던 모양이다.
마을 주민들이 개인적으로 장승에게 풍년과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 영험함 덕분인지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도 징병으로 끌려가거나 6‧25 한국전쟁 때 군에 가서도 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돌장승에게 소원을 비는 동안 청정한 기운으로 마음의 때를 씻고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바람이 사그라진 자리에 봄 햇살에 따사롭게 비친다. 흔들리는 마음을 말끔하게 정돈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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