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남명 조식 선생 발자취를 따라2-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7. 2. 4. 07:00
728x90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합천 삼가 선영

 

설 연휴를 끝난 131일 다들 출근하는 시간, 우리는 나들이 나섰다. 겨울방학 보충수업도 빼먹은 아이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경남 합천군 삼가면으로 향했다.

 


남명 조식 선생이 태어난 생가(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吐里)

 

먼저 들른 곳은 남명 조식 선생이 태어난 생가지이자 외가인 토동(兎洞)인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吐里). 길라잡이인 양 남명교 앞에서 차를 세운 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양(玉免望月)’ 형상을 먼저 들려주었다. 다리를 건너 500년 넘은 느티나무와 그 옆에 있는 남명 선생의 외할아버지 이국의 고조부 이온(李榲)이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묘역에서 기거한 사실을 적은 외톨이 쌍비를 설명했다.

 

마치 어머니와 아들 앞에서 시험 보는 기분으로 남명 선생 생애 설명

 

마을회관에 차를 세운 뒤 생가지로 걸었다. 대문을 열고 최근 복원한 생가에 들어섰다. 텅 빈 마당이 아쉽지만 넉넉한 굴참나무가 반긴다. 간단히 선생의 태어난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마치 어머니와 아들 앞에서 시험 보는 기분이었다.

 


합천 용암서원 앞 남명 조식 선생 흉상. 어머니와 아들 앞에서 시험 보는 기분으로 유적지를 설명했다.

 

다행히 오가는 동안 읽으려고 아이가 가져온 <진주문화를 찾아서- 남명 조식>을 어머니께 읽어드리도록 했다. 남명 선생은 부모가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같이 꾼 뒤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나던 그때 집 앞 우물에서 무지개가 솟아오르고 방안에는 찬란한 보랏빛 광채가 가득했다고 한다.



합천 뇌룡정 마루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어주는 아이 덕분에 다시금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 낸다'는 뇌룡정에 쓰인 뜻을 음미했다.

 

생가지를 나와 근처 용암서원으로 갔다. 서원 앞 흉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뒤 옆에 있는 을묘사직소를 살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구절에 명종 임금은 격분했지만, 언로를 막을 수 없다는 주위의 만류로 무사하게 넘어갔다는 이야기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명종 임금도 격분했지만 언로를 막을 수 없어

 

서원을 찬찬히 둘러본 뒤 서원 바로 앞에 있는 뇌룡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루에 앉아 가져온 책을 읽어주는 아이 덕분에 다시금 죽은 듯 있다가도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못처럼 조용하다가도 우레처럼 소리 낸다'는 뇌룡정에 쓰인 뜻을 음미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본가인 합천군 삼가면 지동은 선생의 흔적은 없다. 선대 묘가 있다.

 

뇌룡정을 나와 선생의 고향인 지동으로 향했다. 뇌룡정에서 길 따라 삼가면 소재지 방향으로 10여 분 승용차로 가다가 하판마을 이정표가 나오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4.6km 정도 더 들어가면 지동 마을이 나온다. 선생의 증조할아버지인 조안습이 한양에서 옮겨와 살았던 곳이지만 선생의 흔적은 없다. 선대 묘가 있다. 원래는 갓골(冠洞)이었다가 행정명으로 지동이 되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여했던 남명 종손자 송재 조계명 유허비에서 남명 선생의 부친인 조언형과 숙부인 이씨 묘소는 600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마을 앞에 가기 전에 남명 종손자 송재 조계명 유허비가 나온다. 송재 선생은 작은할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정 교육으로 받은 분으로 젊어 강개하고 의기가 있었다고 한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여했다. 유허비에서 남명 선생의 부친인 조언형과 숙부인 이씨 묘소는 600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가는 길에 창녕 조씨의 재실인 병산재가 나온다. 양지바른 밭 두덩 사이로 광대나물이 밝은 보라 꽃을 피웠다. 병산재를 지나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차를 세웠다.

 


합천 삼가 병산재를 지나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차를 세웠다. 먼발치에서 선생의 모친인 합천 삼가 하판리 숙부인 이씨 묘를 먼발치에서 보기 위해서다.

 

먼발치에서 선생의 모친인 합천 삼가 하판리 숙부인 이씨 묘를 먼발치에서 보기 위해서다. 선생의 외할머니는 무신으로 세종 때 대마도 정벌과 여진족을 물리치며 4군을 설치한 최윤덕 장군의 손녀다.

 

하늘로 한껏 치솟은 소나무는 시원하게 맞아

 

다시 차를 움직여 포장길이 없는 곳에 세웠다. 어머니는 차에서 기다리고 아이와 흙길을 걸었다. 작은 개울을 따라 기다랗게 찔레나무들이 예리한 가시를 머금은 채로 땅을 기듯이 휘어져 있다. 10분 정도 걸었다. 거의 다 왔을 때 하늘로 한껏 치솟은 소나무는 숨 헉헉거리며 올라온 나를 시원하게 맞는다.

 


남명 선생 선영에 거의 다 왔을 때 하늘로 한껏 치솟은 소나무는 숨 헉헉거리며 올라온 나를 시원하게 맞는다.

 

한줄기 경사지에 2014년에 세운 남명 선생의 5대조와 고조할아버지 추모비를 시작으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묘가 늘어서 있다. 나지막한 돌담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한줄기 경사지에 2014년에 세운 남명 선생의 5대조와 고조할아버지 추모비를 시작으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묘가 늘어서 있다.

 

선생의 아버지 조언형(1469~1526)1504년 문과에 급제해 22년 동안 벼슬을 하여 정삼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를 지냈다. 묘비를 가운데에 두고 오른편에 새로 옮긴 비와 왼편에 국역비가 서 있다.

 


남명 선생의 아버지 조언형 묘

 

묘비는 일반적으로 흔히 보는 비석과 자못 다르다. 벼슬이 당하관에 그쳐 신도비를 세울 수 없었고 관개석을 따로 화려하게 치장할 수 없었다. 선생은 이를 화려하게 꾸며 각별한 정을 드러냈다. 비석 머리 부분(碑首)과 몸체(碑身)를 한 덩어리 돌로 만들었다. 양쪽 측면에 버팀돌(支柱)을 대어 바람과 빗물로부터 비석을 보호하게 했다. 용이 여의주를 보살피듯 항상 마음에서 잊지 않아야 한다(如龍養珠心不忘)”는 구절을 형상화한 것처럼 비수를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보호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여의주가 상대적으로 크게 보인다.

 

남명 선생 부친은 분수에 만족하고 살라고 가르쳤다

 

글은 남명 선생이 직접 지었다.

아아! 여기가 나의 선고(先考)의 묘이다. 삼대(三代)가 같은 산에 있는데 고조부와 증조부에 대해서는 비갈(碑碣)에 기록되어 있다.

 

~부군이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림에 기술(記述)할 만한 덕이 있으면 사관(史官)이 기록을 하고, 백성들이 전할 것이니 과장하고 둘러댈 바에는 뇌()를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가령 말할 만한 덕이 없다면, 아첨하는 말이 되어서 나의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고, 남을 속이거나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나 또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벼슬살이를 20년 동안 하였지만 돌아가셨을 때 예()를 갖출 수가 없고, 집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었으니, 자손들에게 남겨준 것은 분수에 만족하라는 것뿐이었다.

 

두 임금을 섬기면서 특히 수고하고 힘썼지만 품계는 삼품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세상에 구차하게 아첨하여 영화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한길사 출판사 <남명집> 중에서)”

 


남명 조식 선생의 부친 묘비는 비석 머리 부분(碑首)과 몸체(碑身)를 한 덩어리 돌로 만들었다. 양쪽 측면에 버팀돌(支柱)을 대어 바람과 빗물로부터 비석을 보호하게 했다.

 

선생의 아버지는 분수에 만족하고 살라했고 구차하게 세상에 아부하며 영화를 누리고 살지 말라는 가르침을 물려준 셈이다.

 

증조부 때부터 한양에서 옮겨와 살면서 지역 명문가와 혼인 관계 맺어

 

조언형 뒤편에 선생의 할아버지(조영 : 1428~1511) 묘가 있다. 벼슬을 한 적이 없는 할아버지 묘비는 간단하다. ‘처사(處士)’라고 적혀 있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였던 선생 역시 병시중을 들던 제자에게 나를 처사(處士)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내 평생 뜻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지금의 선생 묘비도 이렇게 처사조남명선생지묘(處士曺南冥先生之墓)’라고 적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명 조식 선생의 조부 묘비는 처사(處士)’라고 적혀 있다. 아마도 지금의 선생 묘비도 이렇게 처사조남명선생지묘(處士曺南冥先生之墓)’라고 적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할아버지는 지족당 조지서 누이와 결혼했다. 조지서는 조선 시대 성종 때 세자(연산군) 교육을 맡았다. 연산군은 툭하면 수업이 불성실한 자신을 성종에게 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조지서를 싫어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연산군은 어느 날 벽에다 "趙之瑞大小人(조지서대소인),許琛大聖人(허침대성인)"이라고 낙서를 했다고 한다. 이 낙서를 쓴 연산군은 1504년 갑자사화 때 조지서를 먼저 죽였다.

 

증조할아버지 조안습은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처음으로 들여온 삼우당 문익점의 조카 문가용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렇게 증조부 때부터 한양에서 옮겨와 살면서 이 지역 명문가와 혼인 관계를 맺어왔다.

 


올해도, 내년에도 남명 조식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푸른 희망을 키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했다.

 

가져간 캔커피 한 잔 마셨다. 발아래 펼쳐진 풍광은 시원했다. 햇살은 따사롭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선생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올해도, 내년에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푸른 희망을 키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