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서는 잔디를 마치 벼 수확하듯 캐서 옮기는 풍경이 펼쳐진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봄 자국 소리가 들린다. 스치는 바람은 부드럽다. 햇볕은 따스하다. 올 한 해의 시작은 1월 1일이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새 학년을 맞는 3월이 어쩌면 진정한 출발점인지 모른다. 학부모로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제지간을 떠올리며 진정한 선비를 찾아 3월 10일 길을 나섰다. 스승을 찾아 가족 이끌고 천릿길을 내려온 수우당 최영경 선생을 모신 서원이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 있다.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북방보건진료소 건물을 지나자 ‘수정당(守正堂)’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북방마을 회관을 지나자 들판에는 잔디를 마치 벼 수확하듯 캐서 옮기는 풍경이 펼쳐진다. 북방보건진료소 건물을 지나자 ‘수정당(守正堂)’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차 한 대 지나갈 마을 안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작은 연못이 나온다. 연못 옆으로 소나무가 시원하게 길가에서 반긴다.
차 한 대 지나갈 마을 안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작은 연못이 나온다. 연못 옆으로 소나무가 시원하게 길가에서 반긴다. 소나무 아래에서는 ‘수정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동 수정당은 수우당 최영경 선생과 그 제자인 석정 정홍조 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듯 흰 개가 마을을 깨우듯 크게 소리친다. 옥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어 옥동서원(玉東書院)이라 불린다. 서원은 1910년 덕원서당(德源書堂)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수우당 최영경(崔永慶: 1529~1590)선생을 모시자는 의견이 나온자, 진양 정씨 문중이 최영경의 신원(伸寃)에 힘쓴 석정 정홍조(1534~1590) 선생을 같이 모시기 위해 서당 옆에 새로 1918년 건립했다.
하동 수정당 정문인 유도문
오른편 덕원서당을 지나 먼저 수정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지나온 삼거리 가게에서 서원을 관리하는 동네 어르신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부득이 담 너머로 구경했다.
하동 수정당
정문은 도를 근본으로 한다는 ‘유도문(由道門)’이다. 까치발로 담장을 따라 유도문을 지나 마당을 들어서고 수정당으로 눈이 향했다. 수정당 뒤편 존덕사(尊德祠)로 향하기 위해 담장을 돌았다. 비록 들어갈 수 없지만, 까치발 너머로 최영경·정홍조 선생을 뵈었다.
하동 수정당
존덕사는 수우당 최영경(1529~1590) 선생과 석정 정홍조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수우당 최영경 선생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온 집안이다. 아쉬울 것이 없던 문벌 출신의 서울 사람이었던 최영경은 1565년 지리산으로 실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찾아 제자가 됐다. 맹자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못지않은 배움에 관한 열정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기 위한 자세가 어떠한 지 새삼 느끼게 한다.
하동 수정당 뒤편에 있는 존덕사는 수우당 최영경(1529~1590) 선생과 석정 정홍조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시대 선조가 1591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임명하였지만 사직소를 올리고 입궐하지 않았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돼 서울로 압송됐고 옥중에서 바를 정(正)자를 크게 쓴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년) 신원되어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진주 선비 정홍조 선생은 스승인 최영경 선생의 무고 사건에 증인이 되어 진주 판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최영경 선생의 무고를 주장해 신원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동 수정당 옆에 있는 덕원서당
그 스승에 그 제자가 아닐 수 없다. 존덕사 담장 따라 덕원서당으로 향했다. 담장을 둘러싼 대나무가 바람에 사각사각 흔들린다. 덕원서당의 정문은 경의문(敬義門)이다.
실천하는 유학자로 수우당 최영경 선생의 스승이었던 남명 조식 선생은 <경의>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일깨우기 위해 허리춤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 부르는 한 자루의 단검을 늘 차고 다녔다. 걸을 때마다 방울 소리가 울리고 울릴 때마다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이다.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진 경의검은 ‘안으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고, 바깥으로는 결단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라는 뜻이다. 옮고 그름을 제대로 배워 실천하라는 선생의 뜻이 문에 새겨진 것이다.
하동 수정당 옆에 있는 덕원서당 정문은 경의문이다. 실천하는 유학자로 수우당 최영경 선생의 스승이었던 남명 조식 선생은 <경의>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일깨우기 위해 허리춤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 부르는 한 자루의 단검을 늘 차고 다녔다.
고즈넉한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에서 참된 사제지간을 배웠다. 참된 선비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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