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산청여행)바람이 멈추고 빛이 머물다간 풍경 속에서 에너지 재충전-햇살을 핑계삼아 경남 산청 읍내 경호강 변 걸었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5. 4.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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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럴 때는 떠나는 게 상책이다. 근데 어디로 떠나랴? 멀리 갈 곳도 없다. 직장이 있는 경남 산청 읍내 경호강 변으로 지친 몸과 마음의 평온을 위로받으러 걸었다.

 

경남 산청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척화비.

 

장마처럼 지루한 봄비가 며칠 있고 나서 햇살이 곱게 드리운 4월 10일. 햇살을 핑계 삼아 경남 산청군 산청읍 도서관에 차를 세우고 옆에 붙은 산청초등학교로 걸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산청초등학교 정문에 예쁜 무궁화동산이 있다.

 

동산에는 반송이 가운데 있는데 무궁화 옆으로 척화비가 있다. 학교를 신축할 때 땅속에서 발견된 척화비다. 넉살 좋은 거북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형상의 받침돌에 위로 서양과 화친하면 나를 팔아먹는다는 내용이 한자로 적힌 빗돌이 올려져 있다.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알리기 위해 전국의 주요 지역에 세운 비석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두 조각으로 파손되었다가 현 위치로 복원해 옮겨 놓은 것이다.

 

경남 산청초등학교 입구에 무궁화동산에 무궁화 새눈들이 봄처럼 싱그럽게 돋았다.

척화비 옆으로는 봄을 알리는 ‘봄까치꽃’이 연보랏빛으로, 냉이꽃이 하얗게 피어 있다. 또 다른 비석 3개가 담장 사이에 세워져 있는데 송덕비다. 어쭙잖은 한자 실력과 마모 상태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무궁화에 연둣빛 새눈이 돋았다.

 

아이들은 학교 앞 또래문구점을 들락날락한다. 나올 때는 입에 무언가를 하나씩 물고 있다. 마중 나온 엄마와 함께 애완견과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보인다. 학교 왼편 산청경찰서 쪽 담장 없는 경계에는 꽃잔디가 선분홍빛으로 무리 지어 피었다. 급식실 앞에는 수건이 햇살에 샤워 중이다. 하얀 꽃잔디도 조경용 돌 사이로 피어 눈 부시게 한다. 학교 옆 일반 가정집 담벼락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져 있다.

 

경남 산청초등학교 뒤편 경호강 가.

 

경호강 가로 나갔다. 노란 절정의 개나리는 아니다. 절반 정도는 꽃이 지고 그 자리에 초록 잎을 띄웠다. 저만치 필봉산과 왕산이 보이고 강에는 굴착기가 연신 강바닥의 돌과 모래를 퍼 올린다. 경찰서 뒤편 주차장에 벚나무들이 바람에 그나마 붙이고 있던 꽃을 떨군다. 저만치 날아가던 꽃이 거미줄에 딱 걸렸다. 주차장 맞은편 강변 정자에 잠시 앉았다. 지나가는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정자를 나와 강변 벼랑 바위에 외롭게 붙어 있는 ‘경호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남 산청초등학교과 산청경찰서, 산청군청 뒤편 경호강 가에 세워진 ‘경호정’

 

경호정으로 가는 길은 가팔랐지만 나무길로 만들어져 건강한 사람은 벼랑에 붙은 정자로 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경호정 현판에는 누군가 한글로 압구정이라고 적었다. 한자를 몰라서 그렇게 적은 것인지 아님 서울 한강 압구정의 이름처럼 유명하라는 바람인지는 모르겠다. 경호정에는 새들의 하얀 배설물들이 사람보다는 우리가 주인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정자에서 저너머 필봉산을 본다. 가파른 벼랑 사이로 나무 새순들이 빚은 초록빛이 정겹다. 흰 왜가리 한 마리 강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정자를 나와 산청군청 뒤편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작은 밭에서 정구지(부추)를 뽑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오늘 저녁에 기름을 두르고 지짐이라도 한 장 구워 막걸리 한잔이라도 할 요량인가 하는 생각에 내 입가에 침이 고인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도 나무조각이 인도보도블록처럼 놓여 있어 걷기가 수월하다. 한 걸음 두 걸음 옮길 때마다 새들이 노래한다. 까치 소리 같기도 하고 낯선 새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끈한 하얀 버즘나무가 서 있다. 버즘나무 맞은편 강가 쪽에는 미루나무 3그루가 나란히 서 있어 대조를 이룬다. 널따란 잔디가 나온다. 언덕의 정상부다. 군청이 보이고 작은 읍내가 들어온다.

 

오는 5월 1일부터 10일까지 산청한방약초축제 주제관이 들어설 산청실내체육센터과 약초시장.

 

 

강 건너 산청실내체육센터와 약초시장이 보인다. 오는 5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산청한방약초축제의 주제관들이 들어설 자리다. 머리 위에는 약초시장에서 보면 잘 보일 ‘산엔청’이란 커다란 선간판이 강을 내려다본다. 선간판 아래에는 별꽃들이 반짝인다. 노란 애기똥풀도 저만치 피었다.

 

 

좀 더 위로 올라갔다. 작은 밭이 나온다. 엉덩이를 깔고 앉아 밭일을 볼 수 있는 스티로폼 의자가 나무에 걸려 있다. 냉이꽃이며 씀바귀, 고들빼기들이 지천이다. 밭 옆으로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주위로 봄까치꽃이다. 소나무들은 종족 번식을 위해 꽃가루를 날릴 모양인지 머나먼 우주로 나가는 로켓처럼 솔방울을 곧추세웠다.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봄이지만 발아래는 아직도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내 걸음을 따라온다. 다시 내려가는데 한쪽에는 쇠뜨기 생식 줄기 홀 주머니 이삭들이 새로운 생명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청군청 뒤쪽은 비밀의 정원처럼 조팝나무가 하얗게 반기는 아름다운 숲길이 있다.

 

 

군청 뒤로 내려갔다.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하얀 조팝나무 꽃들이 나를 반긴다. 조팝의 하얀 꽃 아래 시멘트 담벼락 사이로 물 빠짐 플라스틱 관 사이로 노란 애기똥풀꽃이 보인다. 흙먼지 모인 사이에 싹을 틔워 꽃을 피운 애기똥풀의 생명력에 무릎 굽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상수리나무들 아래에는 아직도 싹을 틔우지 못한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있다. 군청 뒤편에 이런 비밀 정원이 숨어 있을 줄 몰랐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향한 나무줄기들이 내 핏줄처럼 얽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군청 뒤 비밀의 정원을 나왔다.

 

흙먼지 모인 사이에 싹을 틔워 꽃을 피운 애기똥풀의 생명력에 무릎 굽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붉은 열매를 품은 남천을 지나 다시 강변으로 걸었다. 까치 한 마리가 2m 거리인데도 날아가지 않는다. 좀 더 가까이 지나가자 그제야 근처 소나무 가지로 날갯짓하며 올라간다. 까치는 나무 위에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냥 제 할 일을 찾아 푸드덕 날아 가버렸다.

 

초등학교 뒤편 강변을 걸었다. 노란 개나리꽃들과 옅은 분홍빛의 벚꽃 사이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한 손에는 과자를 든 20대 청춘이 강바람을 맞으며 지나갔다. 경호교가 나왔다. 아이 둘이 가 금서면에서 다리를 건너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아이가 형이 잡아준 도롱뇽이 가득한 생수병을 자랑하듯 내게 보여준다.

 

1950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환아정.

 

 

경호교 시작점에는 조선 시대 중기 문신이었던 덕계 오건 선생의 시 ‘경호주인(境湖主人)’을 새긴 비가 서 있다.

‘신선이 놀 때 요지만을 고집하랴 / 이곳 환아정 경치 그만 못하리 / 한 가락 피리 소리 봄날은 저무는 데 / 강물 가득한 밝은 달, 외로인 뜬 배에 실려있네’

시 한 수 읊조리니 경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초등학교 자리는 산청읍의 옛 지명이 산음현의 객사가 있던 곳이다. 환아정(換鵝亭)은 1395년 산청 현감인 심린(沈潾)이 객사 서쪽에 건립했다. 현판은 당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섰다고 하는데 동북아 전쟁 때 정자가 소실되었다. 1608년 다시 복원되었는데 1950년 화재로 사라져 버렸다.

 

산청읍내 담벼락에는 그려진 바람개비를 돌리며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에 동심으로 슬며시 돌아간다.

 

 

현재는 환아정 옛 모습의 사진과 함께 표지판을 세워 후손에 의해 다시 복원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환아정 표지석 맞은편 담벼락에는 삼청 누라는 정자에서 아이들이 훈장에게 글공부를 배우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람개비를 돌리며 힘껏 뒤 노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아이들 옆으로 뒤따른다. 나 역시 바람개비를 돌리며 뛰놀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맨 처음 걸음을 시작했던 초등학교 앞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왁자지껄 뛰노는 모습이 영락없는 담벼락의 아이와 닮았다. ‘잘 놀아야 잘 큰다’는 말처럼 신나게 잘 놀고 잘 자라길 바랬다.

 

 

방전된 배터리처럼 축처지는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원한 풍경을 그리워한다. 바람이 멈추고 빛이 머물다간 풍경 속에서 삶의 활력을 얻고 에너지를 충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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