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산청여행) 옛길에서 나라의 큰 스승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만나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5. 5.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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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 문익점 선생 묘소와 도천서원을 찾아

 

흔적만 보았다. 출퇴근길 만나는 이정표에서는 진주-산청 국도 3호선의 4차선을 벗어나라고 유혹했다. 그런데도 번번이 그냥 넓은 길로만 지나쳤다. 59, 그동안 지나온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4차선이 아니라 2차선 옛 진주-산청 길로 차를 몰았다. 우리 사람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3대 요소 의식주중 하나인 옷. 옷의 혁신을 불러온 고마운 이를 만나러 산청군 산청읍 못 미쳐 신안면 신안리에 차를 세웠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자리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 앞.

 

그날은 시골 마을 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열려 먼 곳에서도 잔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 유적지라는 기다란 4면체 돌비석 앞에 차를 세웠다.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선생의 신도비가 먼저 반긴다. 신도비를 모신 비각 앞에는 향나무 두 그루가 마치 제사상에서 향을 피우듯 서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1호인 신도비는 1834(순조 34) 강화도 물 가운데서 돌을 캐어 각 고을 성주들이 등짐으로 3년여를 운반하여 도로 옆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교통 불편한 당시이기도 하지만 3년 동안 등짐으로 운반했다는 정성이 너무 갸륵했다. 1935년 실화(失火)로 비각은 소실되어 1943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문익점 선생 신도비를 모신 비각 창살 위에는 단청이 있는데 어금니를 입 양쪽으로 드러낸 도깨비(?)가 눈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쉬움을 달래며 비각으로 들어가려는데 고들빼기가 발아래에서 노란 꽃잎으로 알은체를 먼저 한다. 비각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잠긴 자물쇠 위로 초록 창살이 고개를 바짝 붙여 안을 들여다보게 한다. 창살 위에는 단청이 있는데 어금니를 입 양쪽으로 드러낸 도깨비(?)가 눈 동그랗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어 뒤로 물러났다. 하얀 쌀과 같이 귀엽게 핀 꽃마리들이 위안을 준다.

 

비각 옆으로는 미끈하게 뻗은 소나무 아래 비와 단이 옆으로 나란히 네 개가 있다. 안내판이 없어 짧은 한자 지식으로 제대로 읽지 못해 갑갑했다. 갑갑한 마음은 땅싸리의 분홍빛 꽃잎이 달래준다. 땀 한 줌 닦고 고개를 들자 소나무 가지들이 푸른 하늘에 양산을 씌운 듯 그늘을 만들어 잠시 더위를 잊게 해주었다. 땀을 훔친 뒤에 차 세운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보랏빛 제비꽃이 살포시 눈에 들어왔다. 무릎을 꿇어 보랏빛 제비꽃의 자태를 들여다보았다.

 

 

도천서원

보랏빛 제비꽃과 노란 고들빼기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홍살문이 보이는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무 아래에 차를 세웠다. 하얀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내 신발을 핥으며 반긴다.

 

 

뒤따라 온 개는 살포시 향나무 아래에서 윙크한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오른편에 말라 죽은 매화나무가 있다. 그 옆으로는 부서진 비석이 한쪽에 있다. 일대 사적지로 단장하면서 세운 종조사업기념비가 여럿 서 있다. 문익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도천서원과 선생의 제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신안사재(新安思齋) 앞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향초처럼 서 있다. 뒤따라 온 개는 살포시 향나무 아래에서 윙크한다. 그리곤 하얀 토끼풀밭과 개량 국화의 일종인 샤스타데이지군락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 서원 옆 살림집으로 나를 안내한다. 아마도 서원을 관리하는 집인듯하다. 살림집 가기 전에 서원의 내력을 소개한 도천서원묘정비(道川書院廟廷碑)에 걸음을 멈췄다.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

 

나라의 큰 스승을 제대로 알고 읽어보라고 끝맺은 비문은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허권수 교수가 쓴 글이다.

 

“~선생이 목화 종자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전파해 온 백성들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데서 영원히 구제한 공적은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이미 널리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선생이 목화 종자를 가져온 큰 공적 때문에, 그 학덕 충절 효행 등 여타의 뛰어난 점이 도리어 묻히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당시 중국에서 막 들어온 성리학을 포은 정몽주선생과 함께 힘써 연구하고 보급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공로가 있는 분이다.~”

 

세로로 기다랗게 4면에 걸쳐 쓰인 묘정비문을 읽느라 목이 아팠다. 힘들게 비문을 읽은 보람은 있었다.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공적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일으킨 학자라는 것과 효자라는 사실도 일깨웠다. 선생의 효심은 왜구를 감동하게 해 효자를 헤치지 말라(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팻말까지 적들이 세우게 했단다. 또한, 고려 우왕은 이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 선생이 태어난 동네를 효자리(孝子里)라 이름 짓고 효자비까지 내렸다. 효자비는 목화시배지에 지금도 서 있다.

 

 

도천서원 내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삼우사로 가는 축대벽에는 분향(焚香)처럼 고들빼기가 꽃 피웠다.

 

개가 들어간 살림집 입구에는 자주달개비가 한낮의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꽃피웠다. 살림집 처마 밑에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라는 글이 새겨진 서각이 붙어 있다. 주인을 찾아도 빈 털신만 문 앞에 우두커니 있었다. 장독대에는 떡두꺼비 조각상이 빙그레 웃는다. 서원으로 들어갔다. 서원 대청마루 한쪽에는 이전에는 감히 생각지 못한 의복문화의 혁신이라는 세종대왕 말씀을 옮겨 적은 액자가 붙어 있었다. 서원 옆으로 남근석과 기괴한 돌이 돌탑처럼 있다. 삼우사로 향하는 축대벽 사이에 마친 분향(焚香)처럼 고들빼기가 꽃 피웠다.

 

 

 

삼우사 문 열자 머리 위로 앞서 신도비 비각에서 본 도깨비보다 더 친근하고 통통한 물고기 그림(?)이 두 눈 크게 뜨고 내려다본다.

 

계단을 밟고 천천히 삼우사 문을 열었다. 문 열자 머리 위로 앞서 신도비 비각에서 본 도깨비보다 더 친근하고 통통한 물고기 그림(?)이 두 눈 크게 뜨고 내려다본다. 여의주를 문 용이 사당 처마에 네 모퉁이에 붙어 있다. 뒤에는 햇살에 땅싸리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삼우당 문익점 묘소 가는 길

 

서원을 나와 산을 올랐다. 150m만 올라가면 선생의 묘소다. 잘 단정된 묘소 가는 길에 뽀리뱅이가 용케 살아남아 있다. 땀을 훔치며 나무 사이에 드러난 서원을 보았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묘소가 나왔다.

 

 

 삼우당 문익점 묘소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조형물이 양옆으로 붙어 있다. 묘는 상석과 비, 좌우 문인석과 망주석, 석등으로 갖춰져 있다. 최근에 묘소에 들였는지 크게 울부짖는 사자상도 문인석 옆에 있다. 봉분에는 씀바귀들이 노랗게 물들였다. 풍수는 잘 모르지만, 묘소 앞 전망이 시원하다.

 

 

도천서원 앞 목화 약수터에서에 얼굴의 열기를 식히고 물을 마실 때 새끼손톱 크기의 벼룩나물이 그런 나를 훔쳐본다.

 

묘소를 나와 신도비가 있던 곳이 아니라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햇살도 쉬어가는 목화 약수터에 잠시 차를 세웠다. 약수에 얼굴의 열기를 식히고 물을 마셨다. 새끼손톱 크기의 벼룩나물이 그런 나를 훔쳐본다.

 

4차선 넓은 길로 쌩쌩 다닐 때는 몰랐다. 굽은 옛길에서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이면을 만난 하루다. 지난날이 성큼 다가와 반갑게 맞이하는 정겨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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