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가야시대 향한 문 열자, 끝나지 않은 길이 펼쳐져- 경남 진주시 가야시대 고분군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4. 12. 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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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도 보지 않았다. 두 걸음 더 다가서자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 걸음을 떼려고 할 무렵 내게로 방향을 돌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이 그냥 가버렸다. 126일 경남 진주시 옥봉동 골목길에서 만난 고양이다. 피라칸다의 빨간 열매가 더욱 예쁘게 골목에 서서 반겨 주는 곳은 가야시대의 옥봉고분군으로 가는 길이다. 피라칸다를 지나자 나무테크가 빙 두르진 길이 나왔다. 햇살 가득 드리운 곳에 추운 계절을 잊은 노란 개나리가 햇살에 빛났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옥봉고분군을 물었다. 몰랐다. 허탕 쳐도 그저 올라가자 싶은 심정으로 올랐다.

 

 

경남 진주 수정봉 정상부에서 50cm가량의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고적발굴지(古蹟發掘地)’가 보였다. 허리를 숙이고서야 보였다.

 

 

산 정상부근에 철제 펜스가 빙 둘러쳐진 곳이 나왔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위쪽으로 좀 더 올라가자 그곳에도 철제 펜스가 빙 둘러쳐진 곳이 나왔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없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50cm가량의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고적발굴지(古蹟發掘地)’가 보였다. 허리를 숙이고서야 보였다.

 

 

진주시 옥봉동 금산공원이 있는 구릉 정상부(수정봉)에는 가야시대 고분군 발굴지가 있다.

 

가야시대의 고분군 뒤로 바위들이 흙 사에 존재를 드러냈고 정자가 있다. 야트막한 구릉 지역인 이곳에서는 진주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의 진산(鎭山)인 비봉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진주향교가 보이고 해 뜨는 풍경이 아름다운 월아산도 저 멀리 드러냈다. 주위 느티나무는 제 몸에 붙은 나뭇잎을 모두 떨구고 햇살에 벌거숭이로 샤워 중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무심한 듯 구름만 힐긋힐긋 지나갔다. 구름 아래로 공원구역보호를 안내하는 안내판이 보였다. 진주시 옥봉동 473번지 외 166필지가 금산공원이라고 적혀 있다.

 

 

수정봉 정상 아래 소나무 밑 긴 의자에 할아버지 한 분이 누워 일광욕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일광욕하기 좋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고 입 가득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일러주셨다.

 

편백 몇 그루가 멋들어지게 서 있는 사이로 정상부를 감아 도는 길이 있다. 고분의 흔적만 있어 아쉬워 걸음을 옮기는데 소나무 아래 긴 의자에 할아버지 한 분이 누워 일광욕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일광욕하기 좋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라고 입 가득 누런 이를 드러내며 일러주셨다. 어르신도 바로 위쪽의 고분군에 관해 알지 못했다. 어느 집의 무덤 터라고만 알고 있었다. 다만 저 건너 편에도 이 같은 무덤이 더 있다고 알려주셨다. 골목길을 내려가는 데 사이사이로 동백꽃망울이 마치 팝콘처럼 녹색 잎 사이로 보였다. 야트막한 구릉을 내려가자 공원 놀이터가 나오는데 비닐로 둘러싼 정자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햇살만큼 따사롭다. 화투패를 빨리 내려놓으라는 말에 나는 못 내놓겠다.”며 실랑이가 한창이다.

 

 

경남 진주시 가야시대 고분군 중 옥봉(순천봉) 3호봉.

 

골목길이다. 골목길 사이로 진주 시내가 드러났다. 높은 빌딩도, 고층 아파트도. 편백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 곳을 돌아 올라갔다. 갈림길이다. 아래로 가는 길로 가면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거란 10만 대군을 무찌른 강민첨 장군을 모신 은열사가 나온다. 위로 좀 더 올라가자 진주 옥봉 고분군이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호인 진주 옥봉 고분군이다. 고분군은 진주시 옥봉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군이다. 비봉산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은 산 정상부인 남봉(南峰-玉峰, 해발 64.7m)과 북봉(北峰-水晶峰, 해발 92.3m)으로 연결되어 있다. 구릉 위에는 모두 7기의 고분이 열을 이루면서 있었다고 한다. 현재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북쪽에 있다. 지금은 집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거나 경작지로 바뀌고 진주고분이라는 이름으로 수정봉 3호분으로 추정되는 고분만이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곳의 무덤 구조는 공주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입구가 길게 빠져나온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 총)이다. 가야의 무덤들이 돌덧널무덤인 것과는 다르다. 이 구릉의 정상부는 아래로 남강을 굽어보면서 강 주변에 형성된 넓은 평야 지대(지금의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으로써, 다른 지역의 가야시대 수장 무덤들이 만들어져 있는 위치와 똑 같다. 이 고분군에서는 백제계 유물들과 함께 대가야의 토기나 소가야식 토기들이 함께 발견되고 있다. 6세기 전반, 이 지역에 있었던 어떤 정치체의 최고 우두머리들이 묻힌 집단적인 무덤임이 분명하다. 이 집단은 독자적인 성격을 가졌다기보다는 여러 계통의 껴묻거리를 볼 때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갑자기 형성된 정치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지역 수장의 묘였을 근거가 각 지역 수장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철기 기꽂이와 청동합 등이다. (진주의 선사가야문화)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아픔은 언제나 되풀이될 것이다. 그래서 옥봉고분군에서 바라본 파란 하늘이 더 서럽다.

 

그러나 조선을 강탈해 식민지로 삼은 일제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대 일본인들이 가야지역을 식민지로 직할 통치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고자 경남 일대에 분포된 가야고분들을 조직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1914년 수정봉 고분을 파헤친 세끼노의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수정봉 고분의 부장품이 고대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고 고구려 것과 달라 가야민족이 일본과 깊은 연유가 있다며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했다.

 

 

경남 진주시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는 수정봉.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일본 동경대학교 종합자료관 건축사 부문에 소장되어 있다. 잃어버린 왕국의 잃어버린 보물이 아직도 가깝지만 멀기만 한 이웃 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아픔을 되새겨보는 과정 없이는 절대로 성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슬픔도 치욕이지만 잃어버린 우리의 유물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현실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아픔은 언제나 되풀이될 것이다. 그래서 옥봉고분군에서 바라본 파란 하늘이 더 서럽다.

 

 

경남 진주시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는 순천봉.

 

바람이 지나간 곳에 다시 바람이 불었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헤쳐 나왔다. 집이 있는 하대동으로 가기 위해 말티고개를 넘어갔다. 나처럼 말티고개를 넘어간 신선이 떠올랐다. 신선은 산봉우리를 어깨에 메고 말티고개를 넘어갔다고 전한다.

 

어느 날 새벽 신선이 순천봉을 어깨에 메고 말티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마침 새벽 일찍 빨래하던 어느 아낙네가 산을 메고 오는 노인을 보고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신선은 그만 산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는데 그게 현재의 순천봉이라고 한다.

신선은 몇 번이고 순천봉을 뒤돌아 보면서 아쉬워했다.

이 순천봉이 진주 한복판에 있었으면 복을 받을 낀데․․․.”

하늘의 뜻에 따른다는 뜻이 있는 순천봉(順天峰)을 시내 복판에 세워 두려는 하늘의 뜻이 무산되어 진주가 더는 커지지 않고 꼭 옛날의 모습을 지키는 고전적인 전통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진주 옛이야기)

 

 

경남 진주시 순천봉의 가야시대 고분군. 이곳에는 구르는 돌 하나, 무심히 선 나무 한 그루에도 가야시대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날아다닌다.

 

옥봉고분군은 가야시대로 향하는 문이다. 가야는 6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1,500년 뒤 후손들이 잊지 않고 이 문을 열고 찾는다면 옥봉고분군은 끝나지 않은 길이다. 가야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계속되는 한 가야의 역사는 계속 깊고 넓어질 것이다. 이곳에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있다. 구르는 돌 하나, 무심히 선 나무 한 그루에도 가야시대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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