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산청 국도(3호선)
출퇴근 시간 90분. 이 시간은 나만의 시간이다. 출퇴근 때의 밀폐된 차 안은,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다. 멍을 때려도 좋고 생각에 잠겨 하루를 준비하고 마무리해도 그만이다. 그런 나에게 초록이 익어가는 5월은 밀폐된 차창 너머로 자꾸 부른다. 그래서 출퇴근 90분이 100분을 넘기기도 한다.
경남 진주 이현동에서 산청입구까지 15km 국도 3호선에 팥빙수의 하얀 얼음처럼 시원한 꽃을 드리운 이팝나무들.
경남 진주 집에서 산청으로 출퇴근하는 국도 3호선(진주-거창). 집을 나서 시내를 지나 본격적으로 국도에 진입하면 실제 20여 분이면 직장에 도착할 수 있다. 5월은 그럴 수 없다. 최고 속도 제한은 80km지만 60km, 40~50km로 뚝 떨어져 비상등을 켠 채 2차선만 고집할 수밖에 없다. 진주 이현동 웰가아파트에서 시작하는 국도 3호선 좌우로 바람맞으며 일렁이는 하얀 물결이 차 속도를 줄이게 한다. 팥빙수의 하얀 얼음처럼 목을 타고 내리는 상쾌하고 맑은 기운이 있다. ‘이밥(하얀밥) 나무’라고도 불리는 이팝나무들이 하늘하늘 거리는 풍경은 가속 페달을 밟는 오른발에 힘이 떨어지게 한다. 진주 이현동에서부터 산청 입구까지 국도변에 심어진 이팝나무는 하얀 쌀밥처럼 맑고 순수한 이를 드러낼 때면 나도 모르게 나 역시 누렇지만 이를 활짝 드러내 인사를 나누게 한다.
이팝나무 꽃.
이팝나무는 ‘이밥’이고 ‘입하(立夏)’다. 이밥은 이팝나무의 꽃이 조선 이씨 왕조나 지배 계급이나 먹을 수 있었던 이밥(쌀밥)에 비유한 것이다. 또한, 여름이 시작된다는 24절기 중 하나인 입하(立夏)에 꽃이 피기 때문에 생긴 입하목이라 불리다 차츰 입하가 이파, 이팝으로 되었다고도 한다.
이팝나무 하얀 꽃 너머에는 슬픔이 하얗게 내려 있다.
‘옛날 옛적 경상도 어느 마을에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이 며느리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가난해 평소 쌀밥을 먹기 어려운 며느리. 제삿날 조상께 올릴 쌀밥이 제대로 되었는지 알기 어려운 며느리가 제대로 뜸이 들었는지 몰라 밥알 몇 개를 먹었다. 그때 마침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이 모습을 보았다. 며느리가 제사에 쓸 밥을 먼저 먹었다고 엄청나게 구박을 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구박에 못 이겨 결국 뒷산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이듬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랐는데 하얀 꽃을 가득 피웠다. 이밥에 한 맺힌 며느리가 죽어 생긴 나무라 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고 불렀단다. (참고 :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 사전>)
이팝나무를 보면 밥맛없다고 투정해온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이팝나무는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졌다. 흰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한다. 사실 이팝나무 꽃이 필 무렵이면 모내기가 시작인데 땅에 수분이 충분하면 나무는 많은 꽃을 피울 것이다. 물을 좋아하는 벼와 생육조건을 닮은 이팝나무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면 결국 벼도 가을에 풍년을 맞는 셈이다. 이팝나무의 꽃은 5~6월 피는데 꽃은 네 갈래로 깊이 갈라져 있다. 9~10월 짙은 감 흑색의 콩알처럼 열매를 맺는다. 물푸레나ant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20m까지 자란다.
진주 명석면 ‘용호정원’
이현동을 출발해 이팝나무들과 인사 나누기 5분여. 터널을 지나자 내리막길 오른편에 조비마을 이정표가 보인다. 이 마을 입구에 ‘용호정원’이 있다. 정원은 1922년 거듭되는 재해로 많은 사람이 굶주리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박헌경(朴憲慶)선생(1872~1937) 자신의 재산을 털어 만들었다. 중국 쓰촨성(四川城) 동쪽에 있는 무산(巫山) 수봉(秀奉)을 본떠 조성한 작은 공원이다. 600여 평 규모의 원형 연못인 용호지(龍湖池)가 있고 연못 주위에는 고분을 연상하게 작은 산봉우리 12개가 있다.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12개의 가산(假山)이다. 수련이 심어진 연못 속에는 팔각정자인 용호정(龍湖亭)이 세워져 있다. 용호정은 연못 안에 초석을 놓은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구조를 하고 있어 물속에서 솟아난 듯 착각을 하게 한다. 정자의 8개 추녀 끝에는 태극문양이 있다. 일제 치하에서 태극문양기와를 사용한다는 것은 보통의 담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었다. 선생은 이 일로 며칠간 옥살이도 당했다.
출근에 쫓기는 아침에는 감히 용호정원에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퇴근하고 난 뒷면 간혹 용호정원에 차를 세우고 혼자 거니는 호사도 누린다. 용호정원은 논과 정원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담장도 없어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다. 연못에는 정자까지 줄로 연결된 작은 배 하나가 묶여 있다. 관리를 위해 자물쇠로 고정되어 있지만 근처 박헌경 선생 후손의 집에 부탁하면 열쇠를 풀어 정자에도 가볼 수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팝나무.
순박한 이를 드러내며 웃던 이팝나무가 아쉽다면 이현동 웰가아파트 앞에 있는 진주냉면집 ‘하연옥’에서 시원한 냉면 한 그릇으로 달래면 좋다. 해물 육수에 메밀국수, 그리고 육전으로 고명을 올린 진주냉면. 평양냉면이나 진주냉면은 원래 겨울에 먹는 밤참이었다. 냉면이 대중화되면서 여름철에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진주냉면은 진주와 가까운 남해 바다에서 나는 개발(바지락조개의 경상도 사투리)을 비롯해 디포리(멸치), 홍합을 이용한 해물 육수와 메밀과 고구마 전분을 이용해 면발을 뽑는 게 특징이다.
어떤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진주-산청 국도. 팥빙수의 하얀 얼음처럼 목을 타고 내리는 상쾌한 이팝나무 덕분에 오늘은 나도 진주냉면 집에서 눈으로 느낀 하얀 시원함을 배에 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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