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숲에서 나왔다. 자전거를 타려고 했다. 큰 애와 둘째 애 자전거 모두가 구멍 뚫려있다. 수리하기도 귀찮다. ‘걸어가지 뭐’하는 생각에 물병과 간식을 챙긴 가방을 둘러메고 나왔다.
경남 진주시 하대동 남강둔치. 저만치 금산교가 보인다. 금산교와 남강교 중간부터 걸었다. 남강 둑을 경계로 아래쪽은 시내를 관통하는 강변도로가 있다. 둑 위에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고 둑 아래 강변에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있다. 자전거전용도로와 사람이 걸어가는 사이로는 풀밭도 있고 각종 야외 운동기구도 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할머니도 있고 뛰는 사람도, 자전거 타는 사람도 있다. 시끄러운 강변도로의 차량 소리도 둑 아래로 내려가면 들리지 않는다.
“재일경도(在日京都) 경남도민의 거리”에 있는 배롱나무.
벚꽃 한철도 끝나고 여기저기 못다 한 사랑이야기 피우듯 하얗고 빨간 꽃들이 가득한 요즘. 배롱나무는 그 사이로 이제 잎을 틔우고 있다. 봄이 아니라 다가올 무더운 여름을 몇 달씩 이겨내고 꽃을 피울 준비를 지금 하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열흘 이상 붉은 꽃은 없다지만 배롱나무의 꽃은 100일을 간다. 그래서 백일홍이라고 불린다. 배롱나무 한 송이가 100일을 가는 게 아니라 수많은 꽃이 원추상 꽃차례를 이루어 이어달리기하듯 차례로 피기 때문이다. 일본에 사는 교토(京都) 경남도민회 회원들이 경남사랑운동과 푸른 경남가꾸기 사업에 참여 여기에 배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귀한 애향정신을 기리기 위해 “재일경도(在日京都) 경남도민의 거리”로 이름 지었다.
걷기 10여 분. 흙길이 나온다. 비포장도로처럼 엉성하지만 분명 흙길이다. 진주 혁신도시를 잇는 남강교 아래에는 라면봉지와 종이컵, 소주병이 흩어져 있다. 라면을 부셔 수프를 뿌리고 안주 삼은 모양이다. 다만, 남강 언저리 돌 사이에 빈 병이며 종이컵을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어 볼썽사납다. 나중에 치우기도 더 어렵다. 다리 밑은 다른 곳과 달리 풀밭도 없다. 황량한 사막 같다. 그럼에도 노란 유채꽃이 삭막함을 잊게 한다.
‘김시민대교’. 대교 한가운데에 선 분홍 ‘꽃잔디’가 어색한 다리 위 풍경을 달래준다.
남강교에서 불과 얼마 가지 않아 김시민대교. 개통했지만 주위 접속도로와 연결되지 않아 나처럼 산책 나온 사람들이 유유자적할 거릴 뿐. 대교 한가운데에 선 분홍 ‘꽃잔디’가 어색한 다리 위 풍경을 달래준다. 대교를 건너 혁신도시로 왔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도 강을 따라 사람들이 쉴 공간들이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다.
다시 돌아 나왔다. 상평교 못 미쳐 이르자 나무들이 연둣빛과 초록빛으로 벼랑에서 손 흔드는 모양새다. 군부대 앞으로 곧게 하늘로 뻗어 올라간 미루나무 세 그루가 보인다. 강에 비친 미루나무 세 그루가 물결에 흘렁흘렁인다. 남해고속도로 진주 나들목에서 진주로 들어오는 관문과 같은 상평교가 보인다. 정오다. 일꾼들이 다리 밑에서 쉬고 있다. 햇살이 좋은지 아예 강턱에 누운 이도 있다. 햇살은 덥지도 않고 따뜻하고 강바람은 살랑살랑 시원하니 낮잠 자기 좋은 날이다. 나도 다리품을 쉬며 준비한 커피를 마셨다. 달짝지근한 커피가 목 타고 넘어가며 입이 즐겁고 강바람은 시원하게 얼굴을 만져주니 그만이다. 나 역시 한숨 자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 정도다.
진주 상평교에서 진양교 사이에 있는 남강자연생태탐방로.
남강 둑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진주 상평공단이 자리 잡고 또 다른 곳은 남강자연생태탐방로가 있다. 진주 도심까지 연결된 자전거도로를 따라 자전거 타며 남강의 경치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인기척에 놀란 새는 날아오르고 자맥질하는 새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남강 자연생태 탐방로를 거닐면 일상의 시름은 잠시 잊는다. 징검다리를 건너며 시골의 정취도 느낄 수 있다. 갈대 길은 사색의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은 세월을 낚고···. 강 건너 석류공원과 어우러진 경치에 잠시 넋 놓고 빠져들었다. 억새 너머로 아파트 숲이 보이는 도심 속의 산책로, 도심의 번잡을 잊고 기운을 충전할 수 있는 남강 산책로. 남강둑을 거니는 것과 색다른 즐거움이다. 징검다리를 깡충깡충 뛰어가기도 하고 두 개를 한꺼번에 폴짝 뛰기도 했다. 강에서 마치 숲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습지 끝나고 무림페이퍼 공장 앞을 지나자 박태기 나무 무리가 밝은 분홍색으로 소복하게 밥상을 차린 듯 500m 정도 줄지어 반긴다.
밥알 모양과 비슷한 꽃이 피는 박태기나무.
밥알 모양과 비슷한 꽃이 피기 때문에 ‘박태기’ 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는 일부 지역에서는 ‘밥티(밥알)나무’라고도 한다. 북한에서는 꽃봉오리가 구슬 같다 하여 ‘구슬꽃나무’라 부른다. 서양에서는 칼처럼 생긴 꼬투리가 달린다 해서 ‘칼집나무’라고 부른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이 나무에 목매어 죽어 ‘유다 나무’라고도 한단다. 해가 잘 들고 물이 고이지 않는 곳이면 어디서나 잘 자라는 박태기나무는 추위에도 잘 견딘다고 한다. 가을이면 꼬투리가 여무는데 꼬투리 안에 납작한 씨앗이 들어 있다. 바람 불면 마른 꼬투리가 ‘달각달각’ 소리는 낸다. 봄에 찾은 남강, 올가을에 다시 찾을 이유가 생겼다.
진주 남강 자전거 전용도로 앞에 세워져 있는 ‘남강과 함께하는 자전거 타기’라는 큼직막한 푯말
진양교가 보이자 ‘남강과 함께하는 자전거 타기’라는 큼직막한 푯말과 함께 자전거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조형물 앞에는 학생실내수영장에서 강둑까지 자전거 전용교량이 세워져 있다. 남강 강변은 자전거 타기 좋은 곳이다.
진양교를 지나 진주교로 걸었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경남문화예술회관에 이르자 각종 조형물이 보인다. 사람들의 조형물 사이로 우주로 향할 로켓을 쏘기 위해 곧게 세운 발사대처럼 소나무들도 바람에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송화 가루는 기운을 돋우고 피를 멎게 한다고 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라는 책에서는 ‘솔’이라는 불리는 소나무는 위(上)에 있는 높고(高) 으뜸(元)이란 의미로, 나무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라는 ‘수리’라는 말이 술에서 솔로 변하였다고 한다. 소나무는 우리 겨레와 함께할 것이다.
옛말에 고양이(괭이)가 소화가 잘 안 될 때면 가끔 뜯어먹었다고 ‘괭이풀’, ‘꽹이밥’이라고 부른다.
아스팔트 옆 시멘트 난간에 괭이풀꽃이 하늘을 향해 노란빛을 띄웠다. 옛말에 고양이(괭이)가 소화가 잘 안 될 때면 가끔 뜯어먹었다고 ‘괭이풀’, ‘꽹이밥’이라고 부른단다. 질긴 생명력의 괭이풀꽃의 배웅을 받으며 걸으며 도착한 곳은 진주교. 남강을 따라 촉석루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대나무 숲길에서 가만히 귀 기울였다. 봄바람은 어떤 소리인지. 대나무 숲길을 나오자 모과나무가 서 있다. 찬 바람 불 때면 향긋한 모과향과 함께 마시는 모과차가 벌써 그립다. 봄인데 벌써 가을이 생각나는 것은 저만치에 서 있는 단풍나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부챗살처럼 갈라지는 자루에 달리는 단풍나무의 꽃은 아주 작다. 헬리콥터 프로펠라처럼 빙글빙글 떨어지는 단풍나무 열매는 어릴 적 친구들과 즐겨 놀았다. 누가 떠 오래오래 공중에 체류해 떨어지는지 겨루는 장난감이었다. 붉디붉은 단풍잎과 함께 가을을 기다린다.
진주교와 천수교 사이 남강 산책로
천수교 못 미쳐 아늑한 숲 속 같은 산책로에서 가져간 과자와 커피를 마져 마셨다. 한쪽에는 차들이 씽씽 달리고 저너머는 강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곳. 진주 남강 다리는 모두 10개. 금산교에서 시작해 남강교, 김시민대교, 상평교, 진양교, 진주교, 천수교, 희망교, 진주대교(고속도로 전용다리), 오목교가 있다. 다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30분이 걸렸다. 진주시는 진양호에서 금산교까지 16km를 자전거 전용도로 만들었다. 아쉽지만 다음에는 강바람을 가르며 자전거 전용도로를 씽씽 달려볼 참이다.
진주성 북장대 밑 골동품 거리에서 만난 넉넉한 웃음의 돌장승.
오전 10시에 출발해 오후 3시가 넘어 천수교를 지나 인사동 골동품거리까지. 골동품 거리에서 만난 넉넉한 웃음이 가득한 조형물 덕분에 오늘 하루의 피로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남강 풍광만 남는다. 무심코 지나 지나쳤던 길, 이제는 다시 걷고 싶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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