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나들이

이 세상 가장 소중한 나자신을 위해 떠난 여행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2. 10. 1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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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미 깊은 날, 내 생일이 며칠전 훅하고 지나갔다. 연차 내어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등산 등을 해오던 기회를 직장일에 치여 잃어버렸다. 다행히 생일에서 불과 이틀 뒤 연차를 낼 수 있었다. 

 

경남 진주에서 출발한 고속버스는 3시간30여분만에 나를 수원이라는 친숙한 이름이되 낯선 땅으로 내려주었다. 서울을 가며오며 수원은 경부선에서 이정표만으로 익히 이름을 알고 있지만 직접 차에서 내려 땅을 밟아보기는 처음이다. 엣 수원성인 '화성'을 완주하는데 3시간여 걸린다는 관광안내소 직원의 말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화성행궁'을 구경하기로 했다.

 

 

홍살문이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원화성'은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대왕이 1794년(정조 18년)에 착공하여 2년9개월 후에 완공한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부근에 용주사를 세워 부왕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화산 아래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전시키고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킨게 현재의 수원이다.

 

 

정문 신풍루 앞에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品'자 형태로 심어져 305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화성행궁'의 역사를 증언한다.  이렇게 심어진 까닭은 영의정을 비롯한 삼정승이 나무 아레에서 어진 사람을 맞이하여 올바른 정치를 베푼다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정문 신풍루 옆에는 1/20 모형 '화성행궁'이 마치 조감도 처럼 한눈에 보인다.

 

 

신풍루를 들어서면 오방기가 길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박색은 동서남북을 파랑,하양,빨강,검정으로 표시하는데 중앙은 임금을 뜻하는 노란색을 사용한다. 방항은 상징동물인 있어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데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남쪽은 주작, 북쪽은 형무가 역할을 한다. 아쉽게도 오방기는 마침 바람도 쉬는 통에 힘차게 펄럭여 기상을 구경할 기회를 놓쳤다.

 

 

신풍루 들어서 오른편에 있는 집사청으로 가는 길목에 6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화성 성역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러움이 깃들어 '영목,신목,규목'이라 불렀다고 하며 예부터 잎이나 가지를 꺽으면 나무 신의 노여움으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한다.

 

 

특히 이 느티나무 앞에 소원을 빌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저마다의 소원을 적은 쪽지가 느티나무를 에워싸고 있다.

 

 

신풍루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집사청. 화성행궁의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한 건물로 2002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집사청을 비롯한 주요 건물마다 방문 기념 스탬프를 찍는 체험코너가 있었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방문의 소중한 추억이 될 듯하다.

 

 

집사청에서 바라보니 구경온 아이들은 널뛰기며 투호로 벌써 신나게 논다.

 

 

비장청 앞에는 드라마<대장금>의 주인공이 포즈를 취하고 서 있다.

 

 

신풍루 들어서 왼쪽에 있는 비장청. 조선시대 감사,유수,병사,수사 등을 따라다니는 관원인 비장들이 사무를 보던 곳인데 그 아래쪽에 서리들이 일한 서리청이 있다. 서리는 문서의 기록과 수령,발급을 담당한 아전이다.

 

 

정문 신풍루에서 곧자 가면 만나는 좌익문.  중양문 앞 동쪽에 있는 중삼문(中三門)이다. '좌익(左翊)'이란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인 중양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단다.

 

 

좌익문에서 돌아서 바라본 신풍루의 뒷편.

 

 

좌익문에서 정면을 보면 조선 군관 복장을 한 이 뒤로 중양문이 보인다. 그 너머에 정전인 봉수당이 있다.

 

 

정오무렵이라 사람들이 없어 조선군관 복장으로 근무 중인 공익요원에게 기념사진 한컷을 부탁했다. 왠일이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근데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임금님만이 다닌다는 '어도'.

 

 

봉수당. 을묘원행 때 헤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었다고 한다.

 

 

봉수당으로 오르는 기단.

 

 

정조의 처소. 정조가 화성행궁 행차 때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를 연출했는데 원래는 유여택이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였다. 편의를 위해 이곳 봉수당에 재현했단다.

 

 

임금 행차시 정전으로 쓰인 봉수당은 중심 4칸을 왕권으로 상징하는 편전 공간으로 연출해 보여주고 있다.

 

 

봉수당에서 바라본 좌익문. 가운데로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어도'가 보인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으로 가는 길목 있는 낙남헌.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기간 중 과거시험과 양로연 등 여러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갑장이었으니 정조는 죽은 부왕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더욱 성대하게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득중정. 정조가 활를 쏜 곳으로 화살 4대 중 4대 모두를 마추어 '기분'낸다고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에게 한턱 쏘았다고 한다. 활도 잘 쏘고 한턱도 잘 쏜 모양이다.

 

 

정조가 날린 화살이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과녁판으로 날아가 가운데를 맞추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양궁을 잘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백병전보다 먼거리에서 싸우는 국궁을 잘했기 때문이라는데 호랑이그림이 저팔계처럼 보인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정조의 유지를 받으러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신 사당과 구별되는 건물로 비록 돌아가신 선왕이지만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 있을 떄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란다.

 

 

초상화인 정조의 어진. 정조가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끈 명군이라고 칭송하지만 서양은 이미 산업혁명을 거쳐 신세계를 개척하던 때인지라 조선의 개혁은 늦었다. 당시 일본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요동치고 있었고. 우리만 잘나서는 안되는 지구촌이다. 절대평가 못지 않게 상대평가가 중요한 시대, 우리는 정조 이후 더 나가지 못했다. 정조도 잘했지만 주변 나라들은 더 잘나가섰으니...

 

 

화령전을 둘러보고 다시 득중정으로 향했다. 이곳에도 범상치 않는 나무가 서있다. 이 나무에 관한 알림판을 못찾았다.

 

 

다만 이 나무사이로 가을햇살이 걸렸다. 푸른 하늘 사이에 앙상한 가지와 그래서 생명이 용트림하며 푸른 잎을 띄운 이 나무에서 지난 조선을 보았다.

 

 

득중전을 나와 내포사로 향했다.

 

 

내포사로 향하는 길 사이로 들꽃들이 반긴다. 비록 장미처럼 화려하거나 향내 짙지 않지만 아름답다. 마치 우리 민중처럼.

 

 

성 밖의 위험을 성 안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내포사에서 목어를 쳐서 알려주거나 깃발을 흔들어 화성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전달했다고 한다.

 

 

내포사에서 좀더 위로 올라가니 미로한정이 있다. 미로한정은 나중에 늙어서 한적하게 쉴 곳이라는 의미란다. 정조14년*1790년) 단칸 육각정으로 건축되어 행궁 후원 서쪽 담장아래 언덕에 올라있다. 미로한정에서 바라본 화성행궁은 미로다.

 

 

가을햇살에 반짝이는 화성행궁의 기와들. 조선 정조의 별장이었던 화성행궁. 서울의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규모를 비할바는 아니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이곳에서 살아갈 생각을 했을 정조. 아쉽게도 49세에 운명을 다했으니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로한정에 내려와 다시 화성행궁 내 정조대왕의 능행 반차도가 담장에 붙여져 있다. 엄청 많은 이들이 참여해 왕의 위엄을 더했으니 얼마나 당시에 큰 구경거리였을지 상상이 간다.

 

 

행궁의 내당인 복내당에 세워진 궁중 여인들의 복장. 왼쪽부터 상궁, 생각시, 나인의 복장이다.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으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인데 드라마 <대장금>만들 때는 상궁이며 나인들이 음식을 만들고 생활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단다.

 

 

선생님따라온 아이들은 건물이 지닌 역사나 드라마 촬영장소보다는 흙에 그저 그림그리며 논다. 이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것 뿐. 잘 놀아야 잘 큰다~

 

 

유여택.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란다.

 

 

유여택 앞에 해시계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시간을 알려준다.

 

 

유여택에서 신풍루쪽으로 보면 외정리소가 있다.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 때 화성행궁의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행사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공간이다. 화려한 왕의 행사 뒤에는 이렇게 숨은 공로자가 많다.

 

 

외정리소에서 바라본 유여택.

 

 

화성행궁을 나와 주차장을 지나면 담장 사이로 화성 서장대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십여분 내외의 길이다. 가는 중간에 약수터도 있어 잠시 목을 축여 올라온 몸을 쉬었다.

 

 

 

서장대. 장대는 모두 두개소 있는데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펴보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사방 100리가 다 보인다. 이곳은 수원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 '화성장대'라고도 한다.

 

 

서장대에서는 사방 100리가 보인다는 말은 허튼말이 아니다. 화성행궁과 수원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으로 연결된 화성이 보이고 수원시내가 보인다.

 

 

서장대 옆에는 서노대가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해 높이 지은 곳으로 서노대와 동북노대 2기가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8각형 평면 기와벽돌로 쌓았다.

 

 

화성. 이 성벽을 따라가면 3시간여 걸린다고 하는데 아쉽다. 다음기회는 찬찬히 거닐며 봉돈,공심돈,화흥문,암문,각루,포루를 보고 말리라.

 

 

서장대에서 내려와 다시 화성행궁.화성행궁 광장 왼편에 화성홍보관이 있다. 화성의 모형을 통해 한눈에 화성과 화성행궁을 살펴볼 수 있다.

 

 

보수공사로 아쉽게도 보지 못한 팔달문.

 

 

임금이 타가다닌 가마 '어연' 임금의 거둥에 타는 가마로 난가, 난여라고도 한다. 가마추녀 위 네 곳에 닭을 형상하는 검은 새가 긴술을 물고 있고 많은 주렴과 색술이 치렁치렁 달린 보장인데다 가마 바탕 둘레에는 용,기린,해태,범,코끼리들이 금빛으로 그려져 위엄을 더했다.

 

 

수원화성문화제가 10월5일부터 7일까지 열렸단다. 아쉽지만 내년에는 문화제때 재현되는 정조의 행차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아쉬움을 달래며 기념품가게에서 아이들에게 선물할 화성을 소재로 한 역사만화책과 화성을 담은 엽서를 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자신을 위해 떠난 즐거운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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