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150년전 이땅에 스스로 각시탈이 되고자 한 사람들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2. 8. 3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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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는다. 대신 영화DVD를 빌려보거나 사서 본다. 간간히 아이들이 만화영화를 보기도 한다. 가급적 <드라마>는 보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프로그램은 <개그콘서트>,<위기탈출넘버원>,EBS 방영하는 <명의>,<디큐프라임>,<세계테마여행> 등과 아이들 만화영화 1시간정도 이내다. 나름의 우리 집 TV시청 규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늦은 시간 귀가해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늦게까지 채널 여기저기를 돌리지만 TV보지 않는 아니 덜 배인 습관 탓에 채널만 여기저기 돌리기 일쑤다.

 

그런 나에게도 최근 가족 모르는 비밀이 생겼다. 처음에 내가 근무하는 생활복지시설 내 어르신들의 즐거운 낙 중 하나인 TV시청을 함꼐 하며 말벗을 나눌 때 였다.

<각시탈>. 일제강점기 조선민중들이 일제의 강점에 제대로 숨도 쉬기 어려운 그 시절. 친일 제국경찰로 자신의 일신을 위해 노력하던 친일파 '이강토'가 우여곡절 끝에 애국독립영웅'각시탈'이 되어 펼치는 만화같은 이야기. 액션연기에 처음으로 주인공을 많은 배우 이름도 알았다. 런던올림픽 스포츠 중계로 결방했을 때는 어찌나 '짜증'이 나든지. 간혹 어르신들과 볼 수 없을 때는 집에서 늦은 시간 '다시보기'로 달랬다.

어제도 저녁근무를 핑계로 낮에 집에 있을 때 아내와 아이들이 각자의 위치로 가 있을 때 신문에서 본 재방안내에 그 시간을 기다려 보았다. 집안 청소도 미룬채. 수목드라마인 <각시탈>을 어제(수요일) 저녁 어르신들과 함께 시청하며 기저귀도 갈고, 본방사수했다. 기저귀를 갈면서도 들려오는 드라마 소리에 온 몸이 그곳으로 쏠림을 느꼈다.

 

오늘은 목요일. 그렇게 재미나게 숨어서도 보았던 <각시탈>을 보지 않으련다. <각시탈>이강토가 종로경찰서 고문실을 탈출하는 그 뒤이야기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을 참입니다. 대신 본방을 사수할 프로그램이 생겼다. 같은 시간대 KBS역사스페셜. 진주농민항쟁을 다룬단다. 동학농민전쟁보다 앞서 이땅의 민중들이 봉기한 항쟁의 역사.

 

아마도 그 시절에도 가슴 언저리의 마음을 달랠 줄 '각시탈'이 필요했었나 보다. 지금도 그렇지만.(드라마<각시탈>관련 사진 KBS홈페이지 http://www.kbs.co.kr/drama/gaksital/event/event03/index.html)

지금도 '각시탈'의 출현을 기다리지만 150년 전에도 민중들은 간절히 '각시탈'이 나타나길 기다렸다.아니 150년 전 이 땅의 조선 민중들은 스스로가 각시탈이 되었다.

 

 

 

진주농민항쟁 150년 기획 "모두가 난을 생각한 지 오래다"편. 진주농민항쟁 1년 전인 1861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백낙신이 진주로 부임한다. 그는 여러차례 비리를 저질러 파면을 당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수십년간 지속된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누적된 상황에서 백낙신의 가혹한 통치와 수탈은 진주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농민들은 합법적 민원 절차이 의송 등을 통해 조정에 수차례 호소했지만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862년 2월18일(음력)무장봉기에 나선다

 

. 조선의 지배층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군정,전정,환곡)운영의 개혁안을 담은 '삼정이정절목'을 내놓는다. 이 개혁안은 1894년 갑오개혁 때에야 일부 반영돼 봉건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구실을 하게 된다. 당시 주모자들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했지만 이제 150돌을 맞아 위상이 재종명되고 있다.

- 한겨례신문 2012년8월30일자 -

 

 

진주농민항쟁 150년 기획
"모두가 난(亂)을 생각한 지 오래다"

■ 방송 : 2012. 8. 30.(목) 22:00~22:50 (KBS 1TV)
■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 글, 구성 : 고은희 작가
■ 연출 : 양승동 PD


1862년, 진주 농민의 피맺힌 함성이
진주를 넘어 한반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수탈과 탐학의 수렁에 빠진 조선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조선 최대의 민중혁명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진주농민항쟁”

역사스페셜은 올해로 150주년을 맞은
“진주농민항쟁”을 집중 조명한다.






■ 1862년 진주,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다


▲ 19세기 진주 지도 ▲ 1862년 당시, 농민항쟁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삼남지역

1862년 한 해 동안에만 전국 71곳에서 농민들이 난(亂)을 일으켰다. 경남 진주는 그해 봄에 처음으로 난이 시작된 곳으로 이후 민란의 기운은 경상도를 넘어 전라도, 충청도로 삽시간에 퍼진다. 그렇다면 유독 1862년에 그 많은 민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시작은 왜 진주였을까?
<역사스페셜>에서는 당시 농민항쟁의 발생배경과 과정을 담은 문서와 현장 취재, 후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진주농민항쟁을 재구성해 본다.



■ 양반세력까지 가담한 반봉건적 농민혁명



▲ 진주농민항쟁의 전모를 기록한 <진양초변록>


진주농민의 거센 기세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안핵사 박규수를 진주로 급파한다. 당시 진주농민항쟁의 발생부터 수습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진양초변록>에서 박규수의 수사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 박규수는 민란의 배후로 ‘홍문관 교리’출신인 유력 사족 이명윤을 지목한다. 그뿐 아니라 당시 지배층에 속했던 양반들도 농민시위대에 합류한다. 양반 중심의 나라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조선 지배질서의 중심세력이던 그들은 무슨 이유로 농민의 난에 가담한 것일까?




■ 농민들은 왜 무력봉기를 선택했나?



▲ 배후로 지목돼 유배를 떠난 이명윤은 죽기직전까지 「피무사실」을 남기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진주성도>(보물 1600호, 계명대 행소박물관)농민시위대가 운집했던 객사 앞 읍내장터를 확인할 수 있다

진주농민항쟁 1년 전인 1861년, 경상우병사 백낙신이 진주로 부임한다. 그는 과거 여러 차례 비리를 저질러 파면을 당하기도 했던 인물로, 진주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수십 년간 지속된 삼정의 문란과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최고조로 누적된 상황에서 백낙신의 지나친 학정과 세금수탈이 진주농민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진주농민들은 합법적 민원 절차인 등소(等訴)와 의송(議送)을 통해 조정에 수차례 호소해왔지만,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862년 2월 18일(음력) 무력봉기를 택하기에 이른다. 무력봉기는 당시 지배층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이를 주도한 이는 다름 아닌 몰락양반 류계춘이었다. 처음 주도자로 몰린 이명윤 또한 류계춘을 실질적 주도자로 지목한다. 강직한 선비 집안 출신인 류계춘은 왜 농민들의 난을 주도하게 된 것일까?




■ 진주농민항쟁의 후폭풍, 그리고 역사적 의미



▲ 지난 6월 24일 열린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제막식
▲ 진주농민항쟁 이후, 조정이 내놓은 개혁안 <삼정이정절목>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고심책을 내놓는데 그 결과물이 삼정운영의 개혁안을 담은 <삼정이정절목>이다. 이 개혁안은 당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일정 부분이 반영된다. 이로써 진주농민항쟁은 기존 봉건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역할을 한다.
한편, 진주농민항쟁은 부패한 조선 사회에 경종을 울렸지만 주모자들은 역적이 됐고, 그 후손들은 '역적의 후예'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왔다. 다행히 올해 150주년을 맞아 기념탑 건립과 위령제가 열리면서 진주농민항쟁의 위상이 재조명받고 있다.

-KBS홈페이지 역사스페셜 소개글 http://www.kbs.co.kr/1tv/sisa/historyspecial/view/preview/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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