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은 볼거리가 많은 도시입니다. 항구와 시장, 벽화 골목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합니다. 중심을 따라 걷는 대신 발걸음을 살짝 비켜 세우면 도시의 속도가 달라집니다.

충렬사 근처가 그렇습니다. 사당을 향해 곧장 오르기보다 계단 아래에서 숨을 고르면, 통영은 다른 얼굴을 내밉니다.
충렬사 계단, 바람이 먼저 앉는 자리

통영 충렬사 돌계단 아래 사거리에서 시선이 멈춥니다. 신호등 아래로 기와지붕이 겹칩니다. 관광의 입구이자 생활의 한복판입니다. 계단을 오르며 숨을 고릅니다. 돌은 차갑지 않습니다. 수없이 밟힌 자리라서 체온을 기억합니다. 계단에 앉으면 바람이 먼저 와 앉습니다. 백석이 연인을 기다렸다는 그 계단에 함께 앉아, 덩달아 그의 사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그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고 적었습니다. 말수가 적은 시 한 줄이 계단 위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맞은편 작은 공간에 백석 시비가 서 있습니다. 그 곁에서 파란 형상이 먼저 시선을 붙잡습니다.

〈파랑 물고기〉(류충렬 작) 입니다. 푸른 물고기 위에 아이가 올라탔습니다. 설명보다 색이 먼저 다가옵니다. 아이의 몸은 앞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시선은 하늘을 향합니다. 비상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글자 위로 나뭇잎 그림자가 천천히 스밉니다. 시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감각만 남깁니다.
골목에서 만나는 이야기


백석 시비에서 건널목을 건너면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조형물이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의 큰 흐름을 세운 그는, 통영을 배경으로 한 『김약국의 딸들』에서 한 가족의 운명을 촘촘히 그려냈습니다.

길 아래에 명정샘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소설에 등장한 샘터입니다. 물은 낮게 고여 있습니다. 깊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이야기를 품습니다.

실핏줄 같은 정당샘길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골목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지나온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골목의 결이 부드러워집니다. 『김약국의 딸들』을 떠올리게 하는 조형물들이 생활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작품은 전시처럼 서 있지 않습니다. 길을 걷다 스치듯 마주칩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일상 속으로 스며듭니다.

이어 만나는 〈두 손 모아〉(박충 작). 빛바랜 바닷가 목재 위에 숟가락 꽃 한 송이가 놓였습니다. 손을 모은 자세가 낮습니다. 기도라는 말보다 평온이라는 감각이 먼저 전해집니다. 서피랑 아래 가게 창문에는 문장이 걸려 있습니다.

유리창에 남은 글귀가 햇빛을 받아 잠시 번집니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집니다.

다시 걷다 보면 연인 조형물이 나타납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어깨가 시간에 맞춰 낮아진 듯 보입니다. 사랑해요,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는 문장이 과장 없이 스며듭니다.

충렬사 근처에서 시작한 산책은 골목으로 스며들며 여정을 마칩니다. 통영의 숨은 자리들은 자신을 숨기지 않습니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 앞에서만 천천히 말을 꺼냅니다. 바람이 머문 자리, 물이 고인 시간, 골목에 남은 문장들이 차례로 다가옵니다. 그 신호를 따라 걷다 보면, 통영은 보는 도시가 아니라 오래 남는 도시로 자리합니다.
▣ 충렬사와 주위 정보
- 충렬사 주소 : 경남 통영시 중앙로 65
- 백석 시비 : 충렬사 맞은편 소규모 공원
- 명정샘·정당샘길 : 충렬사 인근 골목, 도보 이동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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