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찬솔일기

‘무용지용’, 장자가 묻는다-쓸모 있는 사람인 척 살아온 나에게

에나 이야기꾼 해찬솔 2026. 1. 6.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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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5일 자 신문을 펼치다 한 사진 앞에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교토대 연구실을 배경으로 선 노학자 기타가와 스스무(北川進) 교수의 사진이었다. 서가와 논문 더미 사이, 먹빛 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無用之用. 쓸모없음의 쓸모. 대학 교수 연구실의 책장 한켠에서 쓸모를 말하는 글씨라니. 효율과 성과가 먼저 떠오르는 시대에, 저 네 글자가 제자리를 찾은 것이 맞는지 잠시 의구심이 들었다.

기사의 요지는 분명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분야에 30년을 투자했고, 그 시간이 결국 길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노벨상이라는 결과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온 것은 연구실 한쪽에 걸린 저 말이었다.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질문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말해온 쓸모는 무엇이었느냐고 묻는 듯했다. 쓸모를 정하는 기준이 늘 내 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뒤따랐다.

 

가성비로 살던 시절, 쓸모는 계산이었다

 

한때 나는 가성비라는 단어를 기준으로 살았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여행지를 정할 때도, 식당을 선택할 때도 늘 효율을 먼저 따졌다. 가격 대비 만족, 시간 대비 성과. 쓸모 있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를 안심시켰다.

 

여행도 다르지 않았다. 하루를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일정표를 짰다. 한 시간, 때로는 삼십 분 단위로 나눴다. 박물관에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봐야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에게도 그 방식을 은근히 요구했다.

 

그러다 막내아이가 중학교 1학년 역사 시험에서 빵점을 받아온 날, 문득 멈춰 섰다. 그렇게 알차게 보냈다고 믿었던 시간들, 역사 현장을 함께 걸었다고 자부하던 순간들. 오래 남아 있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 쓸모를 증명하려 애쓴 기억만 또렷했다.

무용지용 앞에서, 나를 속여왔다는 걸 알았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쓸모 있는 사람인 척 살아왔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척, 의미 있는 선택을 하는 척. 남들이 알아보면 나도 나를 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내 기준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들려온 기준에 기대어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블로그를 검색해 후기 없는 식당은 먼저 피했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는 산책, 계획 없이 흘러가는 시간, 아무 성과도 남기지 않는 순간들은 의미 없다며 외면했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간, 평가받기 어려운 시간은 자꾸 뒤로 밀렸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는 시간은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사진 속 무용지용이라는 글씨가 유난히 아프게 다가왔다. 글씨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그동안 네가 붙잡아온 쓸모는 무엇이었느냐고.

 

정년을 여섯 해 앞둔 지금, 사진이 던진 질문을 마냥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쓸모 있는 인간인가. 아니, 쓸모 있는 인간인 척 살아온 것은 아닌가.

 

장자가 떠올랐다. 장자』 〈인간세에는 사람들이 유용한 것의 쓰임은 알지만, 무용한 것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재목이 되지 못해 베이지 않은 나무는 오래 살아남는다. 유용함은 칭찬이지만 동시에 소모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이다. 나는 그동안 오래 남기기보다 잘 쓰이기 위해 나를 다듬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남들이 정해둔 쓸모에 맞추느라, 나를 지탱해 주던 넓은 시간을 스스로 깎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무용지용이라는 말은 철학이 아니라 고백처럼 들린다.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록,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없는 산책과 식사. 그런 순간들이 오히려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인다. 내 삶을 받치는 것은 눈에 띄는 성과보다, 이름 없는 시간 쪽에 더 가까웠다.

 

나는 더 이상 쓸모 있는 사람인 척 살고 싶지 않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척 애쓰지 않고 싶다. 동아일보 인터뷰 사진 속 무용지용 앞에서, 나는 답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쓸모를 계산하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으로, 조금은 남겨두며 살아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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