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태 앞에서 한 해를 내려놓고, 조용히 오늘을 맞이합니다
새해가 열렸습니다. 달력 한 장이 바뀌었을 뿐인데,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선이 또렷해집니다. 어제 12월 31일, 저는 그 선 앞에 서기 위해 산청으로 향했습니다. 새해를 더 채우기보다 비워 둔 채 건너오고 싶었습니다. 찾은 곳은 산청 환아정(換鵝亭)입니다.
사의문 앞, 해태가 가르쳐 준 멈춤

경남 산청군 산청읍 군청 뒤편에 환아정이 있습니다. 환아정으로 오르는 길에서 산청읍내가 먼저 내려다보입니다. 겨울 산 능선 아래로 낮은 지붕들이 이어지고, 읍내의 하루는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누각 아래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만이 서 있고, 담장을 따라 굽은 소나무 한 그루가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습니다. 이 풍경 앞에서 마음의 속도가 한 박자 느려집니다.

계단 아래에 다다르면 사의문(思義門) 앞을 지키는 해태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이를 드러낸 표정은 웃는 듯하지만, 전혀 가볍지 않습니다. 해태는 옳고 그름을 가려 사악함을 물리치고 정의를 지키는 상징입니다. 불과 재앙을 막는 뜻도 함께 지닙니다. 궁궐과 관아의 문 앞에 서 있는 까닭입니다.
사의문 앞의 해태는 마치 이렇게 제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이 문을 지나기 전, 네 마음부터 살펴보시오.”

대문 위 현판의 글씨는 소헌(紹軒) 정도준 선생의 휘호입니다. 진주 출신의 서예가로, 숭례문 복구 상량문을 썼습니다. 소헌 선생의 필치는 단정하면서도 기세가 있습니다. ‘의(義)를 생각하라’는 글씨 아래에서, 저는 자연스레 한 해 동안의 선택을 돌아봅니다.
누각의 단청 아래서, 글씨는 무엇을 받았을까?

사의문을 지나 누각에 오르면 환아정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기둥 위로 펼쳐진 단청은 화려하지만, 질서가 분명합니다.

보와 서까래를 따라 이어진 문양 사이로 쌍룡과 길상무늬가 숨듯 드러나고, 색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고르게 자리를 지킵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 이곳이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환아정이라는 이름은 글씨를 써 주고 거위를 받았다는 왕희지의 고사에서 비롯했습니다. 이 누각에는 글과 풍류, 그리고 ‘교환’의 뜻이 겹쳐 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소헌 정도준 선생은 이 글씨를 쓰고 무엇을 받으셨을까요. 답은 멀지 않습니다. 거위 대신 시간을 받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전란으로 사라졌던 누각의 이름을 다시 세우는 일에 자신의 필치를 보태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을 손에 쥐었을 테지요. 혹은 사람들의 멈춤을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해태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고, 단청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글씨를 읽는 그 잠깐의 순간들 말입니다.

난간 밖으로 보이는 산청의 필봉산과 왕산이 에워싼 읍내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대신 오래 살아온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묵은 생각들이 함께 밀려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소헌 정도준이 글씨를 써 주고받은 것은 보상이 아니라 역할입니다. 해태가 문 앞에서 정의를 지키듯, 그의 글씨 또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한 번 더 가다듬게 하는 역할 말입니다.

돌아설 즈음 다시 해태를 바라봅니다. 돌아설 즈음 다시 해태를 바라봅니다. 들어올 때와는 다른 표정이 읽힙니다.
“그대로 내려가서, 오늘을 살아가시오.”

사의문을 지나 환아정에 이르는 짧은 동선은, 연말에 꼭 필요한 마음의 순서처럼 느껴집니다. 옳고 그름을 되뇌고, 글씨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단청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가, 조용히 한 해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날 환아정의 바람은 내 안의 묵은내를 말끔히 털어주었습니다. 오늘을 시작할 여백을 선물 받았습니다.
※ 환아정
-위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덕계로 141
-주차: 환아정 아래 공영주차장 무료 이용.
-관람: 상시 개방(야외 누정)
-참고: 겨울철 바람 강함, 마루·계단 결빙 시 유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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