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남명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점수 자판기 ‘도덕’을 몸소 실천한 조선 선비 각재 하항

에나이야기꾼 해찬솔 2018. 2. 8. 06:30
728x90

대각서원과 낙수암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는 소학(小學)과 일치한 삶을 살았던 각재 하항 선생을 모신 진주 대각서원.

 

점수 주기 위한 점수 자판기로 알았다. 누워서 떡 먹다 체할 까 도덕 과목은 공부하지 않아도 점수는 많이 나왔다. 한때는 도덕 과목을 만만하게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안다.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얼마나 어려운지를. 조선 시대 도덕 교과서와 같았던 소학(小學)을 실천하며 살았던 진짜 소학군자가 있었다. 소학군자를 찾으러 매서운 바람이 불었던 25일에도 차를 몰았다.

 


진주 대각서원과 낙수암으로 가는 마을 입구

 

경남 진주~하동 국도를 따라가다 진양호를 가로지르는 진주대교를 건너 수곡면 사무소를 지나 산청군 단성면 쪽으로 향하다 대각마을에서 멈췄다. 진주 시내에서 승용차로 1시간 거리다. 공부해서 대성한 선비들이 많아 '대각(大覺)'이란 불린 대각에 들어서는 입구 오른편에 '각재 하선생 유허비(覺齋河先生遺墟碑)'가 먼저 반긴다. 남명 조식 선생이 나의 벗이라며 내가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각재 하항(河沆 15381590) 선생은 1538(중종33)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정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진주 대각서원 정문

 

마을을 에둘러 난 작은 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면 대각서원(大覺書院)이 나온다. 서원 앞에 서면 아쉬움이 절로 나온다. 대각서원 7인회에서 관리하며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는데 유림이 지금까지 제향하는 몇 안 되는 서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들어서는 대문 지붕은 낡아 보수를 앞뒀는지 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주위는 어수선하다. 10여 년 전부터 출가한 보살이 관리를 맡아 오고 있다는 데 겨울이라 다른 곳에 기거한다고 한다. 문은 잠겨 문틈으로 서원 안을 둘러보았다.

 


진주 대각서원은 각재 하항 선생을 모시고자 지었으나 남명 선생의 문하인 무송(撫松) 손천우(孫天祐),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 송정 하수일(河受一)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건립 이후 진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남명 문하 유학 선현의 서원이다.

 

대각서원은 각재 하항 선생을 모시고자 지었으나 남명 선생의 문하인 무송(撫松) 손천우(孫天祐), 백암 김대명, 영무성 하응도, 모촌 이정,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 송정 하수일(河受一)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 건립 이후 진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남명 문하 유학 선현의 서원이다.

 


진주 대각서원의 진흙과 호박돌을 번갈아 넣은 토석담장

 

진흙과 호박돌을 번갈아 넣은 토석담장을 따라 까치발로 서원 안을 둘러보는 내게 바람이 한차례 쓸고 간다. 찬바람에 '설중한매(雪中寒梅:눈 속에 핀 매화)'라는 칭찬을 받은 각재 선생의 인품이 떠올랐다. 각재 선생은 1556년 남명선생 56세 때 합천 삼가에 있는 뇌룡정을 찾아가 배웠다.

 


진주 대각서원 전경

 

남명선생이 퇴계 이황 선생에게 쓴 편지(與退溪書)에서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는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쇄소응대진퇴지절灑掃應對進退之節)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옮긴 남명집중에서)”라며 퇴계와 고봉 기대승 선생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중단할 것을 당부하고 실천하는 학문을 당부했듯 각재 선생도 평생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행동했다고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고 결가부좌를 하고 똑바로 앉아 책을 읽었다. 이는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는 소학(小學)과 일치했다 한다. 각재 선생을 일컬어 진짜 '소학군자(眞小學君子)'이라 부르기도 했다.

 


송정 하수일 선생을 모신 진주 하씨 문중 재실인 낙수암

 

대각서원을 나와 차 하나 겨우 지나갈 시멘트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자 진주 하씨의 문중 재실인 낙수암(落水庵)이 나왔다. 낙수암은 송정 하수일(1553~1612) 선생의 7세손인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 먼저 창건한 것으로 현재 건물은 1909년에 중수한 것이다.

 


진주 낙수암 옆 수곡천

작은 개울을 건너 낙수암으로 가려고 했다. 삼단의 폭포에서 얼음을 깨고 힘차게 물이 흐른다. 얼음을 가로질러 낙수암으로 가려니 미끄러워 둘러 돌아갔다. 낙수암 앞 바위에는 '송정선생장구지소(松亭先生杖屨之所)'가 새겨진 바위가 나온다.

 


진주 낙수암

 

개조심하라는 주인의 경고에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몇 번인가 인기척을 냈지만, 기척이 없다. 열린 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강당인 낙수암 마루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치가 참 좋고도 좋다. 인근 초등학교 등에서 소풍 장소로 자주 찾았다는 말처럼 공부하면서 머리 식히기 그만인 곳이다.

 

남명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전수 받은 종숙 각재선생에게 어릴 적부터 공부를 배웠다. 송정 선생은 문장에 뛰어나 단성향교 성전중수기, 덕천서원 세심정기, 촉석루중수기 등의 글을 지었다.

 


진주 낙수암 전경

 

낙수암을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지금은 진주성 내로 옮긴 하공진(河拱辰, ?~1011) 장군의 사당인 경절사(擎節祠)가 나온다. 장군은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이다.

 


진주 낙수암 뒤편에서 바라본 풍경

 

경절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바위에 올랐다. 저 아래 마을을 무심히도 구름은 지나간다. 마음마저 씻어주는 깨끗한 풍경이다. 작은 숲에 둘러싸인 수곡천 사이사이로 참된 선비의 기상이 흘러간다. 선비가 걷던 길 오늘 걸었다.

728x90